석은정 개인전 원천적 물성(物性)과 삶의 성찰(省察)
석은정
2023 04/12 – 04/17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노트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주목받길 원한다.
항상 사람들은 자기의 삶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 ‘생존-그 자체’에 집중 한다.
어느 시골길을 걷다가 담장 사이로 수세미를 보게 되었다.
그 날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려는 몸짓, ‘생존-그 자체’였다.
작은 씨앗의 본질 또한 처음엔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쓰임새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뜻에 나 또한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을 던져 타자를 주목하게 하는 소재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영원함 살아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불완전한 찰나의 시간에 존재하며 살아지는 삶이나 순간에 영원함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삶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천연 재료의 소재를 목적성에 집중하였으며 인생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알고
우리의 삶 또한 희생과 아픔으로 또한 어떤 힘으로 살아가는지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삶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고,
지키고자 하는 그 힘의 원천은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며
기억의 경계의 속에서 나를 지켜가고 지탱해 가는 힘의 원동력을 찾아야 하는 숙명이 되었던 것 같다.
원천적 물성(物性)과 삶의 성찰(省察) 속에서
기억의 경계(境界)를 찾는 작가의 몸부림
Artist’s note
Everyone wants to be recognized and noticed.People always focus on what they have to survive and survival itself in their lives,While walking along a country road, I saw Susemi (Loofah Sponge Gourd)through the fence.It was a gesture to express one’s presence throughout the day, “Survival- itself.”The essence of the small seed was also small and insignificant at first, but I also had to concentrate on the meaning of its use or purpose.I wanted to reflect on myself and express my sense of permanence and living by material that throws itself into the eye of others.We seem to be able to focus on life because we are able to see eternity in the life or moment that exists in imperfect moments.I focused my natural materials on purpose and knew that life was no different, so I was worried about how our lives are also lived through sacrifice and pain.Everyone can see that it’s not easy to keep life intact.I could see that the source of power I wanted to protect existed in my past memories.There is some invisible force in the memory of the past and the memory of the present that continues our lives.I think it became my destiny to find the driving force of power that protects me and supports me in the boundary of memory.
In the fundamental nature and reflection of life,
the writer’s struggle to find the boundary of memory
석은정 작품전
수세미를 매재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물성과 표현 방법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미술에서 재료는 개별적인 형식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재료는 그 자체로 창작의 한 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재료는 일단 새로운 조형 세계의 문을 여는 일이고, 작가의 창작 충동을 자극하여 새로운 형식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왜 새로운 재료를 찾는 데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지에 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석은정은 현대미학이 추구하는 방법론 또는 물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아우르는 작업을 한다. 현대미술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표현 방법은 개별적인 형식으로의 직행을 보장하기도 한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특성, 즉 물성을 표현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 일 또한 현대미술의 특권이다. 기존의 재료가 가지고 있지 못한 물리적인 특성을 현대미술로 변환하는 일은 다름 아닌 방법론의 한 영역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작업은 일단 현대미술의 특징을 잘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새로운 재료의 발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현대미술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끈 재료는 다름 아닌 수세미이다. 오이처럼 길쭉한 모양의 어린 수세미는 식용으로 가능하며, 성숙한 열매는 껍질을 제거하여 세척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얼기설기한 섬유질로 굳어진 심을 작업에 이용하는데, Sponge gourd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른 속 섬유질 모양새는 스펀지처럼 생겼다. 한국에서는 인조 수세미가 나오기 이전까지 설거지와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용도로 쓰였다.
수세미의 섬유질 조직을 본 그는 미술 재료로 쓰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수세미라는 재료가 가진 물성을 표현적인 가치로 제시함으로써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천연물질로서의 수세미는 마치 스펀지 모양으로서 물기가 없어지면 거칠고 단단해지는데, 이렇듯이 입체적으로 형성된 구조체 그 자체로 표현적인 요소가 된다. 즉, 캔버스에 부착함으로써 오브제가 되고 조형적인 재료가 된다. 수세미의 심은 평면적인 이미지 구성은 물론이려니와 입체적인 구조체로서도 손색이 없다.
작업은 단단한 구조체를 잘라 캔버스 위에 이어 붙이는가 하면 패턴을 만들어내고 채색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이 전부이다. 소품에서부터 100호 크기의 대작까지 일정한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캔버스의 크기에 맞는 문양으로 작품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과정은 거의 초기에 완성되었다. 따지고 보면 수세미라는 천연재료를 딱히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현대미술로서의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물망의 구조, 즉 입체적으로 이루어진 수세미의 오묘한 조직 그 자체가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한, 또 하나의 방법론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요인인 까닭이다.
가공된 재료가 아닌 천연재료라는 건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다. 물감을 사용하여 채색을 입힌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표현방식 일부를 가져오는 게 맞지만, 가공하지 않은 천연물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참신하다. 물론 여타 천연재료를 사용해 작업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으나, 수세미라는 독특한 재료는 기존의 방법론과의 대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자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강인한 섬유질, 즉 성근 그물망 같은 입체적인 구조는 나무뿌리처럼 강고하다. 그러기에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 캔버스에 부착하는 것으로 작업이 완성된다. 이처럼 간단한 작업방식이야말로 수세미의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완전히 익은 수세미 껍질을 벗기면 안에 섬유조직이 나오는데 수세미 하나하나의 색깔이 일정치 않다. 천연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따라서 작업의 의도에 따라 착색하거나 색깔을 빼내 흰색으로 만들어 쓰기도 한다. 물론 천연물질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표정, 즉 자연색을 그대로 살린 작품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색깔별로 구분해 패턴을 만들기도 한다. 크기가 다르게 잘라 이어 붙이면서 무언가 의도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가령 작은 수세미의 단면을 자르면 꽃 모양의 패턴이 나오는데 이를 연속적으로 이어 붙이면 꽃송이가 밀집해 있는 듯싶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작품에 따라 방사선 형태의 패턴이 나오는가 하면, 어디선가 본 듯싶은 야릇한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보는 사람마다 그 패턴은 다양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는 작업 과정에서 무언가 구체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어떤 형상을 의식하면서 작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실재하는 물상의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읽히지 않는다. 다만, 심상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불현듯 스치는, 어느 지나간 시간에 마주쳤던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애써 그 이미지를 불러내 재현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작업에 보이는 이미지는 구체적인 형상을 향한 의지가 없으므로 추상이다. 추상이면서도 우연적이거나 무의식과 같이 막연한 건 아니고, 그 자신의 소소한 일상의 기억 그 편린일 수 있다. 어느 시점, 어디에서 끄집어낸 기억의 형상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표출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게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그런데도 어떤 패턴이 나오는 건 기억이나 추억의 창고에 저장된 무엇, 다시 말해 기억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표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 표상은 실체를 동반하지 않는다.
다양한 크기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수세미를 자연스럽게 잘라내 작업하면서 하나하나 선별해 부착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공예에 가까운 일인데 이럴 때 무의식적인 흐름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처럼 무의식의 흐름이 조합해낸 이미지가 문양이 되기도 하고, 또는 단지 작은 수세미 조각들의 집합일 수도 있다. 특정의 형상을 의식하지 않은 채 수세미라는 천연재료가 가지고 있는 표정만을 보여주겠다는 소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작품도 있다. 조금씩 다른 색조의 차이가 지어내는 다양한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적지 않다.
자연의 색깔은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으로 점철하는 현대인에게는 때로 심신이 쉬어갈 수 있는 정서적인 오아시스이자 위안이 될 수 있다. 자연의 색깔은 시각적인 자극이 없을뿐더러 나를 보아달라고 조르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양으로 가만가만히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수세미의 자연스러운 색깔을 그대로 살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어쩌면 채색을 덧붙이는 건 조형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단의 하나로 채색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의 작업은 초기의 평면적인 구성에서 부조의 형식으로 점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세미 모양을 다양하게 잘라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돋을새김과 같은 문양이 만들어진다. 부조처럼 어떤 이미지가 평평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튀어나오는 부분은 현실적인 물상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연상할 수 있는 정도의 형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감상자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체험과 연관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상의 문양은 두껍게 붙여진 수세미를 파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조각의 음각 형태인 셈인데, 적지 않은 작품의 문양은 이렇듯이 수세미를 파내거나 도려내는 식으로 작업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특정의 색깔로 전체를 도포함으로써 작업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양은 작업하는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심상의 현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이미지이든 현실적인 물상의 재현은 아니다. 이처럼 문양이 나오는 경로는 순전히 그 자신의 감정이나 의식의 흐름에 맡기는 데 있다.
하지만 문양이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문양은 작품 전체를 덮는 단색의 색채이미지와 함께 시각적인 이미지의 큰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 또는 비구상에 근사한 이미지로 인해 상상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단색조의 색채이미지는 한국적인 미감의 한 특징으로 인식되는 단색화에의 공감일 수 있다. 단색이 가지고 있는 힘, 즉 아우라는 단지 색깔을 분별하는 시지각만의 문제를 넘어선다. 동양적인 사유체계의 한 영역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한가지 색채로 통일되는 시각적인 이미지 그 안쪽에 정적인 사유의 그림자가 깃들이는 것이다. 단색이란 건 어쩌면 비교개념이 없으므로 구태여 색채라고도 할 수 없다. 한가지 색채로 전체를 덮으면 그 안에 자리하는 문양의 존재감이 약해진다. 그리하여 문양으로 가던 시선이 사유의 공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고 보면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업은 드러남과 감춰짐의 길항관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