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민 개인전 MERAKI

최순민
2020 09/02 – 09/14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최순민 2020년 작가노트-

“MERAKI 27”

섬 이었다.

27년은……

세상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다들 몰려가는 줄에는 서지 않았다.

고독한 길이었으나 ‘메기효과’가 가끔 찾아와 지루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섬은 안전한 보물창고였고 그림과 함께라서 외로움도 즐거웠다.

내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영화’빌리 엘리어트의 대사처럼……

“그냥 기분이 좋아요.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 추기 시작하면 모든걸 잊어버려요.”

 

(작업에 대하여)

1995년, 동판화를 할 때는 작업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동판을 10x10cm 크기로 잘라 부식 시킨 후 각각의 잉킹한 판화를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협소하고 불편한 작업 환경 때문에 나온 작업 방식이 자연스레 나의 작업 스타일로 발전했고 작업 중에 행했던 수없이 많은 시도들은 축적이 돼서 나의 자산이 되었다.

동판화를 하면서 얻은 경험과 판화도구인 스키지, 니들, 면천은 지금도 붓 대신 작업에 즐겨 사용하는 도구인데 자유로운 작업의 발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2004년, 그래피티아트(낙서) 작가인 스페인의 안토니오 타피에 작품을 처음 보고 가슴이 뛰었다. 건축재료의 거친 질감이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체험은 그림 재료에 대한 고정 관념을 흔들었고 재료를 폭넓게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릴 때면 두 손에 사탕을 움켜 쥔 어린아이 같은 행복감에 젖곤 한다.

 

*Meraki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무언가에 온 마음을 다해, 창의력과 사랑을 쏟아 붓다- 그리스어


 최순민, <아버지의 집>

 

장난감같이 생긴 아기자기한 모양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그안에는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깔들과 온갖 화려한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다. 금속조각이나 인조보석들로 치장한 최순민의 그림을 볼때면 십중팔구 두손에 과자를 가득히 움켜쥔 어린아이가 느끼는 그런 행복감에 젖는다.

최순민이 작업의 레퍼토리로 삼아온 것은 다름 아닌 집이다. 힘찬 필선이 넘실거리는 수묵화풍의 회화작품을 해오다 2005년 이후에는 집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집만큼 든든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 종일 세파에 시달리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이 싹 가시고 안도감을 갖는다. 이런 집에 대한 인식은 그의 작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편안함을 주며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은 예쁘고 아담한 집이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이미지들이다. 

이전에도 집을 그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때 활동한 김종찬의 <토담집>(1939)은 쓰러져가는 흙으로 된 집을 보여준다. 말이 집이지 실상은 초라한 움막에 가깝다. 장욱진의 <마을>(1956)에도 집이 등장한다. 두 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데 창문을 통해 한 사람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한 사람 살기에도 버겁게 느껴지는 자그마한 집을 표현하였다. 향토적인 화풍을 선보인 박수근도 집을 자주 그린 편이다. 시골의 기와집과 초가집을 가리지 않고 그렸는데 논밭이 딸려 있거나 마당에 장독대가 있고 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 분위기를 잘 나타냈다. 이렇게 작가마다 집을 대하는 시각이 다르며 화풍에 따라 특색있게 조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순민의 집은 어떤 모양일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언뜻 보기에는 장난감같은 모양이다. 외양상 밝고 화려한 편이며, 종래의 화가들에 비해 서술이 배제되어 있고, 선과 면으로 간략히 요약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집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모양이 집과 유사한 오각형이며 제목으로도 그것이 ‘집’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집의 단면만 크게 확대하거나 실선으로 볼록하게 처리한 것, 심지어는 철선을 용접한 경우도 있다. 다양한 변형을 꾀하지만 대체로 그의 집모양은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많은 집 가운데서도 작가가 형용한 이미지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이다. 작가는 스트라이프, 별, 도트와 같은 여러 장식과 칼라플한 색지 및 인쇄물을 이용해 집을 꾸민다. 영롱한 인조보석은 그림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가는 애당초 집의 구조와 세부를 재현하는데 신경을 쓰기보다 집의 이미지, 즉 집이란 어떤 곳인가를 더 강조하려고 애쓴 모습이다. 어떤 것은 궁궐같은 곳도 있다. 세모의 지붕과 듬직한 돌기둥, 그리고 본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별이 빛나는 하늘에 세워진 으리으리한 도성(都城)같은 곳도 있다.

작가는 왜 이처럼 ‘아버지의 집’을 화려하게 꾸몄을까? ‘아버지의 집’이 대궐같거나 화려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새삼 이런 작업을 한 것같지는 않다.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집’이란 돌이나 목재나 대리석으로 만든 가시적인 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거주하는 곳이란 상징성을 띤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감하며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연구해야할 신적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우리가 머무를 곳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스러운 분으로 인식할 뿐 그분과 함께 산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윗은 이런 우리의 인식에 일침을 가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안식도 위로도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부와 향락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무언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바람에 나부키는 겨’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행여 누군가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사업의 실패로 낙심할 때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치된다면 어떨까? 성경은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한다. 우리 존재의 심연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내면의 준비가 담보되지 않는 한 진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심겨진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은 자신과 남들에게 끝없는 기쁨과 새 힘의 출처가 된다.

오늘도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최순민의 작품은 이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의 집은 광채로 번뜩이고 기쁨이 넘쳐나는 곳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을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태연한 척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면 아버지의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 영혼이 새 기운을 얻고 싶을때 ‘하나님의 집’만큼 좋은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에만 맘 편히 안식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편 23편에 펼쳐진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여호와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고 고요에 잠기게 하신다. 단순히 집을 제시하였을 뿐이지만 작가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서 있을 때처럼 만족감과 행복감을 전달한다. 그 분의 집에 들어가 내내 살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곳에 있을 때의 정조(情操)를 실어냈음을 뒷받침해준다.

사실 우리가 창조주의 영화로움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색과 리듬감 만으로 그 상태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적 상태를 시각언어로 바꾸는 제약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조형언어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화면을 들여다보면, 흰 바탕은 단아하면서도 포근하다. 질료감을 주려고 바탕에 하드보드를 깔고 다시 한지를 서너 번 입히고 그 위에 다시 페인트를 칠하거나 돌가루를 뿌려서 견고한 바탕의 느낌을 살려냈다. 말하자면 재료의 고유한 맛을 살려내면서 평면을 잘 가다듬어 내밀성을 잘 간직하도록 한 셈이다. 그리하여 배경의 충실함을 통해 주제의식이 분명해지도록 했다.

작가는 마음의 은밀한 집을 보여준다. 그안에서 영원한 기쁨의 모형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창조주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하는 순간이자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영원한 행복’과 ‘끝없는 안식’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즐거운 분이시다. 그 분의 풍성한 사랑과 관대함은 그 분의 무한한 기쁨과 깊이 이어져 있다.”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은 자아내시고 바깥으로 유출시키시기에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제공받는다. 최순민이 아버지의 집을 지극히 사랑스럽고 정성스럽게 꾸민 것은 실제로는 집 주인의 풍성한 사랑과 관대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근래에 작가는 집 시리즈에서 정물로 소재를 약간 넓혀가고 있다. 작은 종이조각으로 된 모자이크식으로 바꿔 종전보다 훨씬 장식적인 느낌을 더하였는데 화분에 꽃과 식물이 자라는 것이라든지 물고기와 빵을 수북이 담은 광주리를 표현한 것 등 조밀한 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제목은 <선물>이다. 이미지는 살짝 다르지만 사실 작품상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아버지의 집>이 창조주의 영화스러움을 나타냈다면, <선물>은 은혜 충만한 세상을 나타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상기하면 모든 게 ‘선물’로 다가온다. 하나님이 이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베푸신 것은 그 분의 자비와 사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가는 아마도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담지 않았나 싶다. 최순민의 그림에는 빵이든 열매이든 식물이든 풍족하다. 음식으로 치면 ‘성찬’이요 꽃으로 치면 ‘백화난만한 동산’이다. 그것을 단순히 꽉 찬 이미지로 파악한다면 작품이해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그득한 충만한 은혜의 표시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베푸셨던 것처럼 오늘도 가슴에 멍울이 든 우리에게 ‘영혼의 만나’를 제공하고 계심을 알게 해준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선물>임에 틀림없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