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연 개인전 널 아일랜드(Null Island)로 가는 길

최갑연
2020 05/27 – 06/01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노트

고목은 죽은 나무의 잔해이지만 꼿꼿한 정신과 기상은 살아있는 나무 못지 않은 신비로움과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인류의 조상들이 남겨놓은 수 많은 유적들을 볼 때에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 흔적들은 시대 정신으로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오늘날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최첨단 과학 기술들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 다양한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류의 슬픈 초상화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정치, 사회, 경제 구조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인류의 정신적 사고와 사유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데이터 및 정보 기술은 우리 시대의 신, ‘돈’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방향성마저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널 아일랜드’는 적도와 본초 자오선이 만나는 (0,0)의 지점으로 실제로는 ‘값’이 없는 가상의 Null데이터를 의미한다. 지오코드 맵(Geocode Map)상에 존재하는 이 ‘섬’은 우리 시대의 빅 데이터가 만들어 낸 산물로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현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조회되는 온라인 좌표 상의 섬 (Null island)이다. 데이터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자각하는’ 시점에 이른다면, 널 아일랜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또 다른 현실’이 될 것이다 ‘갈릴레오의 오류(Galileo’s Error: foundations for a new science of consciousness)’에서 필립 고프(Philip Goff)는 정량적(定量的)으로 나눌 수 없는 정신(의식)의 ‘모호함’을 ‘커다란 구멍(a huge hole)’으로 표현하는데, 미시적이며 동시에 거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과학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이 과거의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체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류가 도구로써 발전시켜 온 기술은 이제 스스로 ‘생각’하려 하고, 인간은 생존을 위한 또 다른 가능성과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거대하게 얽히고 설킨 유기체 같은 구조로 연결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기술 가속화의 불안한 현실을 살아 가고 있는 것 같다. 기술 문명을 기반으로 한 인간 중심적 사고 체계가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발생시키고, 인간은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연의 속성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하는 기술의 속도와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인지도 모른다. <널 아일랜드로 가는 길>의 인류와 기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우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통합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붉은 번트 시에나로 물들여진 널 아일랜드의 풍경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거대하게 얽힌 구조 속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불안함을 표현한다. 진화의 방향성이 기술에 지나치게 치우친 현 시대가 문명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우리의 의지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