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환 개인전 숨, Breath
조창환
2018 10/24 – 10/29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개념 없는 차이 또는 분화하는 반복
조창환에게 자연, 특히 생명체와 예술을 잇는 것은 숨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그림으로 표현할 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놀라움을 주는 사건, 기념할만한 역사적 장면, 환하게 핀 꽃이나 탐스러운 과일, 파도치는 바다나 불타는 저녁 노을, 빼어난 몸매나 세상의 중심인 자신의 모습 등등. 그런 소재들에 비한다면 자명하면서도 잘 의식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독특하기 까지 하다. 그러나 숨은 그 모든 현상들에 대한 반응을 포함한다. 세상의 긍정적인 면 뿐 아니라 부정적 면까지도. 긍정적인 면이든 아니든 그의 작품에서 숨은 빠른 시간 동안 달아오르고 식는 것이 아니라 미미한 지속이다. 전자의 경향이 뜨겁다(hot)면 후자는 차갑다(cool). 그러한 느낌은 작품 표면의 균일한 효과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균일성은 차이의 지글거림으로 가득하다. 멀리서 보면 균질적이고 차갑지만 다가갈수록 이질적이고 뜨겁다.
마치 태양이 멀리서 보면 그저 평평한 둥근 원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떤 경계도 없이 지글거리는 불덩어리인 것처럼 말이다. 조창환의 작품의 경우,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는 기복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관철된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hot과 cool 의 대조로 역사와 선사(원시) 적 시간 감각을 비교한 바 있다. 구조주의 인류학자의 어법에서 cool은 기복이 있기보다는 꾸준한 것, 특수하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은유한다. 보편적 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여러 분야의 공감을 받아 구조주의 시대를 열었다.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자들마저도 후기 구조주의라 불릴 만큼 그 위세가 강했다. 전통이라는 중심이 사라진 현대, 뭔가 항구적인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거짓 새로움이 지배하는 현대에 예술 또한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에 대답하고자 한다.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인 자연은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다. 긴 주기에서 보면 역사 또한 자연이다.
보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누구라도 맨 먼저 자연을 떠올리게 되며, 조창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인생도 매일매일, 매순간순간의 지속적 시간성이 탄생과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 만큼이나 중요하다. 작가가 의식하고 있는 호흡이라는 행위는 잔잔한 지속의 시간을 대변한다. 숨 쉬는 존재가 실행하는 작업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고 언제 어디서 끝날지 모르지만, 그 중간적 과정을 늘려나가려 한다. 그의 작품에는 제일 아래층에 찍은 선들이 다 가려지지 않을 정도의 밀도감이라는 기준이 있다. 실제의 호흡은 생명과 직결되는 현상이다 보니 좀 더 극적이다. 매 순간 의식하지도 않은 채 일어나는 들숨과 날숨은 방해를 받는 순간에야 의식화되는 준자동적인 반복현상이다. 산을 매우 좋아해서 우리나라 30대 명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산정의 맑은 공기는 또한 숨의 존재감을 새삼 인식하게 할 것이다.
작가는 숨쉬기처럼 반복되기에 잘 의식되지 않는, 그러나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동영상도 아닌 회화에서 숨을 재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숨은 시간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숨이 그림으로 그려진다면, 그것은 시간의 공간화에 의한 것이다. 관객은 역으로 공간을 시간화 함으로서 작가의 숨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창환은 맑은 공기나 오염된 공기가 있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기를 이루고 있을 법한 입자적 현상들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추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숨쉬기를 닮았다는 점이다. 예술은 나의 생명이다는 식의 시적 비유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양자의 닮음은 보다 실제적이다. 터럭 하나로 이루어진, 특수 제작된 ‘갈기 붓’에 물감을 찍어서 쌓아 올린 수많은 미세한 선들은 그에게 숨쉬기에 상응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흔적 없는 것들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의 말대로 ‘선으로 만든 면’은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수행적 작업을 닮아있다. 작가가 한정한 공간에 쌓이는 시간들, 그 시공간이 주는 힘이 압도적이다. 노동은 ‘창조’에 비해 가치가 없는 행위로 여겨졌지만(특히 예술에서), 차이를 낳은 것은 반복이다. 조창환은 수 억 년의 시간이 압축된 지형을 한눈에 볼 때의 그런 느낌을 작품 하나하나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자연에 내재 된 무수한 층들을 한올한올 살아 움직이는 선의 축적을 통해서 구축한다. 한 번에 휙 가는 예술작품도 있지만, 무수한 반복과 그러한 반복에서 야기되는 차이에 대한 감각을 중시하는 예술도 있다. 한올한올 쌓여서 만들어낸 군집적 형상은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하얀 배경 위에 올려진 다양한 형상들도 있다. 비슷한 조형적 요소의 반복적 실행은 움직임의 환영을 낳는다. 지글거리면서 먼 우주의 전자파를 수신하는 모니터 화면 같은 느낌도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보면 작품들 사이의 잠재적 움직임도 감지된다. 작은 작품의 경우 캔버스 틀이 움직이고 있는 부분을 담는다. 보다 큰 전체의 일부같은 모습으로.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작품 한 점당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밀도 높은 작업과정을 수행하는 것은 한 오라기의 붓이다. 한선(한올)로 된 붓은 일직선이지만 붓마다 굽은 정도가 다른 꼬부랑 선이다. 그린다기 보다는 찍는 이 갈기 붓은 행위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도구이다. 작품 속 선 하나하나가 호흡 하나하나의 기록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미미한 행위들을 기념비화 한다. 그가 작가로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한 삶을 산다면 맨 마지막 호흡 또한 한 올의 선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호흡의 변화는 작품에 반영된다. 한올로 이루어진 갈기 붓은 층이 많이 쌓여도 밑바닥에 찍은 선들을 완전히 덮지는 않는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갈기붓의 흔적은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아서 전체적 효과에 기여한다.
이번 전시작품에서는 배경과 형태가 구별되지 않는 전면구도(all over)를 포함하여 화면을 이루는 여러 층의 호흡을 살려내고자 한다. 그 이전의 층이 다 덮이고 만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한 작품은 대개 13층 안팎의 층이 깔려있다. 한 층이 한 가지 색으로 만들어진다. 일부가 가려질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들은 각기 다른 층의 선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꿈틀거린다. 그의 작품은 하늘이나 바다에서 군집을 이루어 운동하는 생명체들의 집단적 율동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집단지성을 통해 더욱 가치가 부여된 집합적 현상이다. 사진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가지만 적절한 조명 아래 육안으로 보면 입체적이기까지 하다. 인상파가 그렇게 했듯이, 팔렛트가 아닌 망막에서 순간적으로 조합되어 지각하게 하는 시각적이자 촉각적인 작품이다. 근대시대 인상파들의 분할화법은 명암대조에 의존했던 이전 시대의 칙칙한 색감을 걷어내고, 도시 근교 야외와 인공광을 반영했다.
작품마다 주조 색은 있지만, 여러 색을 사용한다. 시작하는 색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밑에 있는 층들이 받쳐줘야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성된다. 조창환의 작품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자연에 바탕 한다. 그는 관념상의 추상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된 추상적 요소를 가시화한다. 관념상의 추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는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한다. 가을이 되어 단풍이 질 때 나뭇잎의 녹색이 붉은색이나 노랑색으로 변한다기 보다는 온도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이미 있던 다른 색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작가는 잠재된 여러 색 중에서 어떤 하나를 두드러지게 하면서 다른 색조의 작품을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입자의 차원에서 이합집산한다. 한 번씩 꾹 눌러서 만든 것이라 점이지만, 동시에 선이기 때문에, 입자 또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자연계의 법칙을 떠올린다. 점이자 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견고함보다는 유동성을 강조하며, 정확한 경계가 없는 자연에 상응한다.
쌓여감으로서 만들어지는 형상은 상호적 침투와 교환, 그리고 변용이 특징이다. 고대의 원자론을 비롯하여, 만물을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는 것은 과학의 특징이다. 자연예찬론자 에머슨이 별부터 나무까지 모든 자연이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노래했듯이 말이다. 환원은 추상을 말한다. 작가는 환원된 자연의 요소를 조형적 요소로 변주할 때 경직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붓의 결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그의 작품은 환원된 근본적 요소 만큼이나 요소들의 운동성을 강조한다. 초창기의 작품이 다양한 형태를 채우는 선들이 특징적이었다면, 요즘 작품은 형태가 그만큼 다양하지는 않고 전면회화로 조형요소의 움직임만을 강조한 작품도 많아진다. 환원적 요소만이 강조될 때, 작품은 내용적으로는 관념화, 형식적으로는 패턴화(장식화)될 위험이 있다. 조창환의 작품에서 무엇을 모방했는지 확정 짓기 어려운 형상들 내부의 유동성은 빠르고 예측불가능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반응해야 하는 유기체를 닮았다. 입자/선으로 이루어진 구조체는 변화 중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멀리서 보면 정지된 듯 평온한 평면이지만 다가갈수록 역동적인 조창환의 작품은 카오스를 내장한 코스모스이다. 누군가 만든 신조어에 의하면 카오스모스이다. 카오스 이론가들은 무질서에 또 다른 가치를 부여했다. 제임스 글리크는 [카오스]에서 건강한 동력학 계는 넓은 범위의 리듬에 적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무질서하게 보일 수도 있다. 우주는 코스모스지만, 코스모스가 가능하기 위해 카오스가 있었다. 조창환의 작품에서 점/선이 구성하는 덩어리들은 과정이자 형태인 형상들은 생명체의 특성을 가진다. 생명의 질서에 대한 탐구는 과학자의 영역에 속해왔지만, 현대과학의 새로운 개념들은 심미적 영역과 교차 된다.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모든 생명체가 가지는 위대한 질서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화는 무질서에서 보다 큰 질서를 계속적으로 쌓아 나가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모든 생명체는 그것을 에워싼 환경에서 자유롭게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서 무질서로 와해되는 것을 지양한다.
이러한 에너지의 궁극적인 원천은 지구상의 존재에 있어서는 태양이다. 생명은 주변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에너지를 섭취하며, 그러한 과정은 죽음으로서만이 끝난다. 죽음은 환경과의 완전한 평형상태를 말한다. 조창환의 작품에서 쌓여진 것들과 빈 배경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는데, 그것은 마치 생명처럼 자유로운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는 선을 층층이 쌓아가는 과정은 생물이 에너지를 수집하는 과정을 떠올리며, 그러한 쌓기를 통한 형태의 변형은 생명이 에너지를 변환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즉 조창환의 작품은 문화 또한 자연처럼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과 문화라는 이원 항을 폐기하고자 한다. 이원 항은 늘 상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구조로 귀결되곤 한다.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 이성과 감성, 중심과 주변, 서양과 동양 등등.
이러한 이원적 구조에서 예술은 그다지 좋은 위치를 할당받지 못했다. 본질과 가상을 구별했던 플라톤주의적 관념론이 대표적이다. 조창환의 작품은 자연과 문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간주하는 사고의 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관념론이 아닌 실재론의 편에 선 철학자 질 들뢰즈는 반복을 개념 없는 차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을 정태적인 반복과 동태적인 반복으로 구별한다. 전자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되면, 후자의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한다.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전자의 반복은 공전(公轉)의 성격을 띄고 있고 후자의 반복은 진화의 성격을 띄고 있다. 전자의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후자의 반복의 기준의 진정성에 있다. 물론 들뢰즈는 이 두 가지 반복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고 말했지만, 예술적 반복은 재현적 반복과 차이가 있다.
조창환의 작품은 들뢰즈의 기준에 의하면 정태적 반복이 아니라, 역동적 반복이다. 작가가 규정한 조형적 단위가 수평적으로 죽 이어지면서 하나의 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층을 공존하도록 만드는 방식은 들뢰즈의 두 가지 반복 중에서 긍정적인 축에 속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a에서 b로 가고 다시 b에서 a로 돌아올 때 정태적(부정적) 반복은 원래의 출발점에 다시 도착하지만, 동태적(긍정적) 반복은 a와 b, b와 a 사이의 반복에 있어서 장(場) 전체의 주파이거나 점진적인 기술(記述)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별법에 의하면 점/선을 한면한면(한층한층) 쌓는 조창환의 작품은 예술작품 특유의 차이와 반복의 유희를 구가하는 셈이다. 그의 작품 또한 ‘반복이 차이의 분화소’이자 ‘차이와 분화의 역량’이고, ‘차이는 부단한 탈중심화와 발산의 운동’(들뢰즈)을 보여준다. 자연에 뿌리를 두되, 결코 자연을 재현하지 않는 조창환의 작품은 차이를 향하는 반복적 행위와 관련된다. 그것은 ‘재현이 아닌 생성을 향한다’(들뢰즈)는 점에서 창조적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