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영 개인전 도시환각 City Hallucination
전선영
2019 04/10 – 04/15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노트
본인은 디지털 시대 속 인공 이미지 편집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이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쉽게 편집, 조작 대상으로 보고 있는 이미지 편집 사회상을 다루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본인은 이들을 ‘미디어루키즘 사람들’이라 부른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벼움을 느끼고 디지털 이미지 편집에 익숙해져 모든 것을 가볍게 보며 디지털 이미지들이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식과 감각마저 마비시켜 부분적인 환각의 인식 상태로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표현 방식은 주로 도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수성 실크스크린 잉크에 transparent(잉크의 투명도 조절 용액)를 많이 섞어 잉크에 투명도를 주거나 픽셀화를 시켜 현실의 존재물보다는 환영 같은 느낌의 이미지로 표현 하여 작품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미디어루키즘 사람들이 재건축과 재개발을 너무 쉽게 보며 도시개발을 위해 땅과 자연을 무작위 하게 훼손하고 이것을 덮으려 인공 자연을 만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본인은 <도시환각 City Hallucination>라는 전시 제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실험적인 연작을 만들어 관객들과 가상, 증강 현실을 앞두고 있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공유하고 평가 받고자 한다.
도시 산책자의 환각–꽃
김정현(미술평론가)
걸어 다니는 도시인들의 눈에 ‘환각-꽃’이 핀다. 환각-꽃은 더 이상 피고지지 않는다. 도시를 향유하며 유랑하는 자들의 환각-꽃은 깊은 무의식 세계로 치명적 뿌리를 고착시킨다. 그 꽃은 불사의 생명력을 자랑한다. 작가 전선영은 지지 않는 도시 산책자들의 눈에 핀 환각-꽃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2019년판 <도시환각(City Hallucination)>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 루키즘에 편집당한 주체
<도시환각>의 근원에는 루키즘(lookism)이 자리한다. 루키즘은 2000년 미국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종교나 인종, 성별 등의 차별에 이어 새롭게 급부상한 외모 차별을 꼬집으며 제시한 용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외모지상주의를 뜻한다. 작가는 이전 <시각 사회(Visual Society)> 연작에서 이러한 외모지상주의에 편승한 사회와 그것에 사로잡힌 주체를 그려냈다.
큐브형태의 구획된 도시 프레임에 갇힌 채, 마네킹처럼 인간미 없이 비쩍 마른 여성들. 이 복제된 여성들은 모두 낚시 바늘에 낚인 존재처럼 모빌로 떠다닌다. 저당 잡힌 부속품 같다. 자의건 타의건 누군가 모빌 줄에서 떨어져나간다 한들, 염려의 시선은 그 누구의 몫도 아니다. 대체 가능한 도시 유랑자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 대용물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주체는 적극적인 자기 주도적 행위를 저당 잡힘으로써 비로소 도시-주체의 형태로 겨우 표상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도시 주체는 루키즘에 경도된 자신을 방치할 정도로 무기력하기만 한 것일까?
* 계량화된 큐브 도시
전선영 작가의 도시는 ‘큐브’로 집약될 수 있다. <시각 사회>로부터 이번 연작 <도시환각>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도시의 프레임을 큐브로 인식한다. 큐브는 20세기의 디자인 변천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대량생산은 규격을 기본 전제로 하며, 수작업을 최소화할 수 있고, 단 기간 다작이 용이하다. 우리는 곡선의 자유 형태를 지향했던 아르누보보다 직선의 바우하우스가 여전히 실용적으로 유효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 지형도는 대량생산화된 디자인으로 그 골격을 갖추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미니멀’이란 키워드 속에 간략한 수치화를 적극 활용한다. 이처럼 작가는 간략한 큐브의 형태로 무차별적으로 정제된 현대의 도시를 미니멀하게 구축한다. 전형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도시다.
* 경제적 자유유의와 인간 물신주의
이 큐브 도시에 깃든 사유 체계는 무엇일까?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견해처럼, 20세기는 파시즘, 공산주의, 자유주의의 거대 이야기로 집약해 들여다볼 수 있다. 사후적으로 역사의 자취를 되짚어보면,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그 시작은 광대했으나 그 끝은 참담했다. 한편 21세기에도 전 세계인들이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주의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는 좋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간략히 말해, 자유주의는 집단보다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철학 사조다. 역사상 그 기조에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이 가장 강렬하게 깔려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에 그 공을 넘겨준 듯하다. 경제적 자유는 개개인의 적극적 부를 향해 치달았고, 극단의 지점에 인간 자체가 물신주의의 대상이 되는 상품화 전략에 모순적으로 빠져버렸다.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오히려 복지와 평등에 대해 눈을 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만연한 개개인의 극심한 경제적 자유 행위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가치와 친근한 어깨동무를 하려들지 않는다.
전선영 작가의 조직화된 큐브 도시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이러한 경제적 자유 행위의 극단에 선 물화된 자들을 친절히 대변한다. 이 주체들은 보들레르나 벤야민이 20세기 초반 파리를 산보하는 도시 산책자들에게서 바라본 세련된 낭만을 지닌 것도 아니고, 1960년대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격렬한 신체적 저항을 담아낸 것도 아니다. 낭만도 저항도 찾아볼 수 없는, 날씬하게 규격화된 비-주체적 주체들만이 이 큐브 도시에 유영한다. 그렇다면 이 주체들은 비-주체적 유영으로 끝날 것인가?
* 디지털 프린트에서 실크 스크린으로의 전이
<도시환각> 시리즈의 물화된 주체들이 꿈틀대는 조형적 방식을 따라가 보자. <도시환각>은 대부분 실크 스크린 기법만을 사용한다. 이전 <시각 사회>에서는 디지털 프린트와 실크 스크린의 혼합된 방식을 사용했던 것과 변별되는 지점이다. 작가가 “디지털 프린트된 이미지들은 디지털 시대에 미디어가 낳은 조작되고 변형되는 허상의 이미지이고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실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 작가는 기법을 통해 허상을 벗어난 실재로의 귀환을 구체적으로 지향한다.
* 허상과 실재 사이에 균열 공간
<도시 환각>에서 다루는 공간은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인셉션(Inception)>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타자의 무의식 세계가 조작 가능하다는 설정을 근간으로 한다. 주인공 코브 역을 맡은 디카프리오가 타자의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 마주하는 세상은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 공간과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공간은 누군가의 무의식 세계가 깨지는 순간, 아스팔트 차량도로가 90도로 꺾이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는 취약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작가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자신의 <도시환각> 공간에 차용한다.
유연한 체조선수와 잠수부로 변형된 주체. 작가가 등장시킨 체조선수는 공을 걷어 올리듯 힘찬 발차기로 큐브의 응집을 해체시켜 버린다. 여기서 주체는 비록 연약해 보이지만, 더 이상 모빌에 묶인 허약한 마네킹 같은 존재가 아니다. 체조선수가 걷어 올린 큐브 도시는 인간의 무의식이 깨어나듯 작은 단위로 쪼개지며 환각 상태를 벗어나는 중이다. 좌우, 직진, 유턴 등을 지시하는 교통신호표지가 그려진 아스팔트 위, 그 위로 사상누각처럼 붕괴되어 떠 있는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를 바다처럼 유영하는 잠수부. 이 구성요소들이 지시하는 방향은 과연 어디인가?
* 풍선 도시의 거품을 환상으로 응대하는 방식
‘권력의 발생에 유일하게 필요한 물질적 요소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가 『인간의 조건』(1958)에서 남긴 말이다. 아렌트는 고대 도시국가로부터 인간은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도시건설을 중시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경제적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루키즘이 사람들을 장악하려면 도시가 필요하다. 도시를 배회하는 자들은 무언가에 경도되고 그 순간 특정 권력이 행사되기 마련이다. 도시와 권력, 그 심연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채 그냥 받아들이는 무의식적 환상이 자리한다. 그 환상이 정직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환상이 환각으로 느껴졌을 때 우리는 훨씬 고심하게 된다. 전선영 작가는 풍선으로 만들어진 건축 도시를 환각으로 들여다보는 중이다. 알록달록 풍선으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언제 터져버릴지 모를 거품이다. 그래서 작가는 거품 도시를 환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주체, VR 안경을 착용한 채 가상현실을 목도하는 도시 산책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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