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옥현 개인전

윤옥현
2019 12/11 – 12/16
3 전시장 (3F)

작가 윤옥현의 작품은 기억과 순간순간의 감정이 침잠된 결과이다. 존재에 대한 고찰을 담은 명상이며, 오랜 시간 이어 온 자신과의 끝없는 이야기다. 이때 기억은 삶의 언어이면서 유동하는 오늘의 진실된 모습이다. 기억은 또한 다양하고 실험적인 예술을 잇는 하나의 비실제적 매개이다. 그런데 그것 자체다. 여기엔 사실상 어떤 설명이나 내레이션이 필요 없다.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고 각자의 방식대로 수용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예술 역시 원인에 따른 결과를 잉태한다. 때문에 반드시 해석이 요구되고 가치구별도 존재한다. 다만 해석과 가치구별에 관한 주석을 작가에게 기대지는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해야 할 과정도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작가 또한 딱히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적시한 것처럼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고 각자의 방식대로 수용하면 될 뿐”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으로 다시 회귀하는 탓이다. 따라서 이 비평은 윤옥현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론이라기 보단 그의 삶과 연계된 작업의 배경, 그 작은 서사에 대한 ‘말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윤옥현의 작품들을 시각적으로 잘못 이해하면 지극히 서양적인 관점에서 창조되는 의식의 산물처럼 다가온다. 화려한 색깔, 다양한 재료, 이성적으로 조합된 사물을 하나씩 구축해 나가는 조형방식에서 볼 때 주지주의적인 것처럼 비쳐진 다는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작가의 작품은 ‘동양-적’이다. 개념적이면서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사유의 결이 진하게 일렁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유의 결’은 여백으로 인해 형을 띤다. 여백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채움으로써 비워지는 장소이며,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무대이다. 그런 점에서 2004년 이후 그의 작품들은 동양적 관념, 비의도적인 시간의 순연과 닿아 있다. 이는 작가와 의 대화에서 받은 인상에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의도적인 관점에서 보이길 거부하며 형과 색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길 원한다. 작업과정 자체는 물론이고 드러남 역시 ‘틀’이 없기를 바란다. 대신 정신과 마음에서 발화된 개인적 서사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읽혀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표출이란 ‘기억’ 속에 똬리 틀고 있는 지속적인 또는 상시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 정체성 혹은 존재성에 관한 의문을 다양한 예술분야(설치, 회화, 퍼포먼스, 오브제 작업 등)에 접목해 성찰하고 자문하는 것이랄 수 있다. 허면, 그의 작품들은 그러한 스스로의 자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소 그렇다. 본래 마침표 없는 자문자답이기에 늘 되돌이표를 그릴 수밖에 없지만 순환의 고리는 시간의 테만큼 두께를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노트를 통해 “기억(또는 추억)은 늘 강력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잠재의식 속에 묻혀 모호해지고, 사람들은 기억의 틀을 조금 더 유리한 방향에서-혹은 더 잘 이해하고 조정할 수 있는 쪽으로 바꾼다.”고 말한다. 이어 “가끔은 불가피하게도 기억상실을 경험하기도 하며, 따라서 기억은 소멸과 변형이 이루어지기에 기억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이는 달리말해 기억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위 내용만 놓고 보면 윤옥현의 작업배경이 무엇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기억의 부재’와 ‘기억의 존재’라는 불완전한 두 축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개인의 고유한 정신적, 감정적인 부분을 시각언어로 생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기억이 변형되거나 보존되는지에 대한 관심도 반영되어 있다. 사실 기억의 부재와 기억의 존재라는 두 축은 ‘자의식’을 텃밭으로 한다. 자아-자각-깨달음은 결국 하나의 맥락이다. 이와 같은 낙맥은 나무에 실을 수없이 감거나 기계부품에서 상상력을 도출시키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로도 드러나고, 과거와 현재, 기억 과 탈 기억, 생성과 소멸, 이성적 접근과 감각적 형식의 예술언어로 도출된다. 가끔은 막연하거나 미완성 상태로 있을 감정에 형(形)을 부여하는 것 모두 자의식을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홍경한(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