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내리 개인전 ‘ 다 · ㄹ · ㅁ · ㅏ’
변내리
2019 01/02 – 01/07
2 전시장 (2F)
‘ 다 · ㄹ · ㅁ · ㅏ’
수 많은 화론중 나는 “화여기인(畵如其人)” 이란 문장을 좋아한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여러 무거운 해석들을 제쳐두고 그림이 작가를 닮아 있고, 작가만의 맛이 난다는 의미는 윤리적 판단을 떠나 작가에게 기분 좋은 칭찬임에 틀림없다. 그림이 작가를 닮았다는 것은 그 작품 안에 작가 자신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의미를 넘어 작가만의 맛이 난다는 것은 화면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해석을 미각으로 환원시켜 느끼는 일종의 희열(catharsis)이니 맛의 구분을 떠나 어찌됐든 기분좋은 맛(단맛)일게다.
‘닮다’, ‘담다’, ‘달다’의 단어는 이번 변내리 작가의 전시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작가는 현대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자, 작가, 강사, 자식(女息), 어머니, 며느리, 부인이다.
우리는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분류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시간적 단계와 같은 사전적 해석만으로 쉽게 정의하여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한 작가에게 투영되어 나타나는 그 단어들은 수많은 개별적 의미체계를 지니게 되고 또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매 순간 선택
으로 완성되어가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상적 가치관을 상징하는 뜻으로 분화될 수 있기에 보편적인 정의나 사전적 이해만으로써 작가에 대입시키는 이 단어들에 대한 정의는 미리 예단하거나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언어적 위계와 영역을 일단 뒤로
하고 그저 작가의의 삶을 지긋이 바라다보는 것부터가 창작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고 담아가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닮다’
작가의 하루는 자신의 어머니의 삶과 닮아있다.
그녀는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하루를 시작하여,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생활하며, 한명의 여자로써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삶의 패턴이 작가의 삶을 영위함에 얼마나 큰 제약과 고통을 스스로 무던히 절제하고 또 선택해야만 하는 것임을 작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또한 작가는 이것을 기꺼이 즐겁게 인내하고 받아들여 스스로 포용하고 있다.
소녀에서 여자로 그리고 부인에서 어머니로 변화해왔던 그녀의 작품 속 시선들은 자신의 고향 속 풍경을 떠나 현재 자신의 속해 있는 삶의 영역인집과 작업실 주위의 풍경 안에서 조용히 그리고 담담히 양육하고 배양시키고 있다.
작은 화분 속 분재처럼 재배되고 있는 정원은 작가의 휴식처이며 안식처다. 이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삶의 공간에서 스스로 가꾸어 가고 있는 이상향과 닮아있다.
즉 작가가 삶에서 느끼는 수많은 절제와 고통을 채집하여 이를 화면 속으로 이환시켜 스스로의 수양적 방법인 양성공간에 이입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감정이 승화된 일종의 ‘여유’나 ‘쉼’이란 형태와 형상으로 전환되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에게 밤은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적 심미관의 표출이다. 이 시간의 영역대는 일종의 이상적 경계로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체계를 무시하고 작가의 사유체계를 공감각적 영역 속으로 투영시키는 무한한 배양체다. 그 배양체를 자신의 삶에 중첩하고 투여함으로써 화면 속에 자신만의 감성과 접점 되어 독특한 美感과 味感을 발아시키게 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은 담담하고 꾸밈이 없는 하나의 관찰기 또는 일기와 같다. 그러니 작가의 작품은 이미지(象形)로 적어 놓은 작가만의 人生史아니 仁生寫라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담다’
작품이 작가를 닮아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화면 속 작가의 이상적 공간은 작가 자신과 함께 세상에 희망하는 소소한 위안과 안식을 담고 있으며, 맑음(淡), 담백함(澹), 편안함(憺), 이야기(談)하고 이를 양육하고 있다.
‘담다’는 어떤 것을 저장하는 것과 소비하는 것 그리고 공유하거나 배려하는 것이라는 여러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이러한 작가의 ‘담다’에는 더불어 배양과 육성이라는 의미가 가미된다. 화면 속 화분이란 소재와 공간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이상공간(이상향)이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소유물 상태에서 벗어나 한 아이와 함께 공유 되었으면 하는 시대적 가치관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자신만을 위한 소유개념에서 탈피하여 우리가 책임져야 할 후속세대에게 전승 시키고픈 희망과 나눔 이라는 공유개념으로 변화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꿈꾸고 있는 평안과 위안의 가치관이 이타적 개념으로 그 무게추가 옮겨지고 있음이며, 또한 다음세대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의미형식으로 전달되어 또 다시 그 들에 의해 배양되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현대의 예술과 문화가 추구해야 하는 지향점이 선의(善意)적인 시도와 도전 그리고 가치관과 함께 병행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달다’
無味의 맛은 오래도록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맛 없음이 아니라 한 가지 맛으로 확연히 정의 할 수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싫증이 나지 않는 맛과 변화가 함축된 맛 예를 들면 물은 맛을 느낄 수 없는 無味의 것이지만 마시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 맛을 다르게 느끼곤 하며, 싫증나지 않는다. 오래두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 중 그 맛(개성)이 강한 것은 드물다. 앞서 작가의 작품 공간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맑음과 담백함 그리고 편안함은 이러한 無味에 특성과 가깝다. 작가의 작품이 ‘달다’ 라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이 無味에서 느껴지는 싫증나지 않는 맛 계속 즐기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이 맛은 화면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맛들 중 작가가 삶을 영위함에 매 순간 충실하고 만족을 느끼는 가치관이 환원된 맛이다. 그 만큼 많은 것을 버리고 인내하는 고됨과 쓰라림이 작가를 통해 새롭게 승화된 맛임을 이해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특성을 이유로 이번 변내리 작가의 전시는 자신만의 ‘다르마’(dharma)를 표현한 것 이라 설명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진리의 의미인 ‘다르마’는 종교적인 개념으로 법(法)으로 한역되곤 한다. 이런 종교 또는 신앙적 의미체계를 떠나 단어 자체가 지니는 원뜻인 ‘유지하는 것’, ‘지지하는 것’ 또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방점을 두고 변내리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게 되면, 작가는 만물을 지배하는 불가항적이고 절대적인 원칙(法)과 이치에서 하나의 인간이 지니는 미온함과 불안정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어머니의 마음(母
性) 또는 모체(母體)로 느껴질 수 있다. 가변의 상태로서 연속되어 진행되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작가의 작품이 이러한 다르마로 이해 할 수 있음은 앞서 제시한 세가지 해석이 모두 작가의 삶속 자신의 선의적인 선택에 의해 완성되어지고 있는 ‘온화함의 表象’이기 때문이다.
미술학 박사 장 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