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진 개인전 5th Solo Exhibition

김희진
2018 09/19 – 09/24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김희진의
삶의 흔적을 증거하는 <Evidence of Life> 연작
-“맹인의 기억”에 비추어 해석하기.
서영희(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2018년 9월,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판화작가 김희진이 공개하기로 한 작품들은 삶의 이쪽에서 내밀하게 응시해 온 일련의 풍경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식의 풍경화는 아니다.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더듬어낸 心象의 풍경들이다.
불어인 aveugle(맹인)는 a-oculis에서 유래한 단어로 눈이 있으되 없다는 뜻이다. 사실 눈을 감고 보면, 꿈꾸거나 환각의 장면을 연출하는 몽상가-본래 예술가는 몽상가다-의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눈을 뜨고 망막으로 보는 것보다, 흘끗 엿보거나 그래서 실제로 본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비전이, 나아가 아예 눈을 감고 의식 아래로 내려가 경험했던 삶을 기억의 단편으로 끄집어 올린 이미지가 더 마음에 닿는 진실된 비전이 아니던가? 드로잉으로 그리거나 목판을 새기거나 영상으로 비추던가 하는 김희진의 작업은 이 같은 눈 멈과 관련이 있다.
“맹인의 기억”에서 J. 데리다는 눈 감는 일은 눈앞에 있는 것을 지우기 위해서이고,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의식을 떠오르게 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말은 김희진의 최근작들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여성 인체를 모티프로 감성어린 “감정의 드로잉” 연작을 제작했던 그가 지난 2015년 무렵부터 감정의 퍼덕임(날개짓 in “Angel” 연작)을, 그리고 2017년부터는 좀 더 사색적인 문제로 이입하여 존재-being, 삶의 흔적들을 탐색하는 작업으로 전환했다. 이 전환에 대한 필자의 물음에 작가는 감정의 흐름을 넘어 ‘왜 나는 이 작업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어 자신의 ‘존재하고 있음’ 즉 삶의 차원을 표현할 수 있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삶의 편린들을 마주하려면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기억들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최근작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일련의 심적인 이미지들, 눈을 감고 보게 되는 스펙터클들이다.
김희진의 <Evidence of Life> 연작은 명확한 시각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존재하고 있음과 삶은 그만큼 불확실하다. 관객은 마음속 깊이로 내려가 볼 필요가 있다. 과거와 현재,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들을 경험한 자신의 기억 단편들에 의지한 채 바깥을 향한 망막의 눈을 감아야 한다. 그러면 작가의 목판화 혹은 영상 작품은 어느새 삶의 흔적들을 증거하는 놀라운 스펙터클로 떠오르게 된다. 의식의 주름들, 감성의 접힘과 펼쳐짐 사이를 넘나드는 풍경들이고, 형상과 여백 사이에서 생과 소멸, 빛과 그림자를 오가는 삶의 여정임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의 눈으로 얽힌 드로잉 선들을 뒤따라 가다보면, 잊힌 감동과 전율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evidence of life’ 바로 그것을 말이다.
필자는 이 짧은 글에서 작품의 깊이를 분석할 수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하여 데리다가 D. 디드로의 편지에서 발췌한 한 문장을 여기에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처럼 작가의 최근작들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지운다. 그 대신 접혀있던 마음속 광경, 보이지 않던 존재의 흔적과 사랑스러운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보여준다. 드러날 듯 말 듯 애매한 심적 풍경들은 젊은 판화작가가 우리에게 단지 망막이 아닌 온몸의 감각으로 꿰뚫어 보아야 할 그것이 sight가 아닌 insight임을 가리킨다. 이 글쓰기는 그 같은 작가의 논리를 이해하도록 이끄는 방편이다.

작가노트

 나에게 작업이란 ‘나는 작업을 왜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무작정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처음의 테마는 내가 작업을 시작 할 수 있게 한 첫 계단이었을 뿐 그것이 본질적으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작업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돌고 돌아, 내린 결론은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이곳에 남기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나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존재했던 나의 흔적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 나라고 생각했던 그림 속의 인물은 점점 ‘나(김희진)’의 특성을 잃고 불특정한 누군가의 흔적으로 변모한다. 그림속의 인물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고, 누군가 이면서 나이기도 하다. 그 곳 그 순간에 존재했던, 누구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인물의 흔적이다.

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는 눈앞에 없는 그 기억을 더듬어 그려낸 것이다. 그 날 보았던 풍경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기억 속에 흐릿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더듬어 그 이미지를 재현해 낸다. 인물의 이미지는 선으로 인해 흩어지고 풍경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관객들은 인물의 이미지를 인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거나 심지어 발견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지러운 선의 집합체로 흩어진 인물의 이미지는 단지 그 장소에 있었던 존재의 흔적일 뿐이다. 선으로 재구성된 인물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인물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이미 그 형태를 잃은 이미지는 그 곳에 존재했던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지도,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의 알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사실 인물의 이미지는 그곳에 존재 했던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인물의 이미지가 작가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곳에 누군가-타자의 초상-가 존재했다는 흔적일 뿐이다.
인물의 이미지(작가의 자화상)는 풍경의 이미지와 결합되어버렸다고 앞에서도 언급했다. 이로 인해 인물은 더 이상 인물로 존재 할 수 없고, 풍경도 단순한 풍경으로 존재 할 수 없다. 인물이 풍경과 마주함으로서 인물과 풍경의 경계는 사라졌다. 그림 안에서 풍경은 인물을 돋보이게 해 주는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인물의 이미지가 풍경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두 개를 구분 짓고,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가리는 이분법적 사고는 여기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렇다고 해서 풍경과 인물이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단지 이미지들이 결합을 꾀하려고 하는 과정이다. 두 객체의 이미지는 선을 통해 하나로 합해지려 하지만 풍경과 인물은 끊임없이 서로를 밀어낸다. 이미지들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보존하려 하면서도 서로와 결합하려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풍경과 인물의 이미지는 서로가 본래 가지고 있던 의미에서 벗어나고 해체되어진다.

 나무를 파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다. 예상도 서지 않는 긴 시간동안 나는 그저 앉아서 묵묵히 나무를 파낸다. 작품을 제작하는 시간 중 절반 이상이 나무를 파는 과정이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나무를 파고 완성된 작업을 보면 완성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 보다는 내가 깎아 만든 나무에 대한 낯섦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과 파고 있을 때의 행복감은 행위의 반복과 함께 점점 사라지고 결국엔 내가 만들어 냈지만 내 것이 아닌, 내가 만든 것 같지 않은 하나의 사물이 눈앞에 놓여있다. 나는 반복되는 나무를 파는 행위를 통해 내 것이었던 나무와 멀어진다. 나무에 상처를 내며 그 안에 나의 생각을 새긴다. 나는 말끔하게 완벽했던 나무를 나의 생각과 의미를 담은 불완전한 사물로 바꾸어버린다. 내가 바꾸어버린 나무는 더 이상 내게 속하지도 않고 내가 바꾸어야 할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 의미를 가진 하나의 독립체이다. 내 손을 거친 불완전하고 낯선 나무 작업이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내 손을 떠날 시간이 온 것일 뿐이다. 내가 만들었는데 내 것이 아닌. 내게 나무를 파는 행위는 그 작업을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