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린 개인전 IN

작품해설

인생은 찰나와 같고 우리는 저마다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은 점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 집착하고 있는 많은 것들은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이 작은 동그라미 속에 가득 채울 것들을 찾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처럼 나 또한, 점 하나를 그리고 채워 갑니다.

 

동시대에 코로나를 함께 겪고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정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울과 슬픔, 하지만 그속에서 희망과 기쁨을 찾고 다시 용기와 에너지를 얻고자 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것은 절망과 좌절을 겪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전시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이 힘든 시간속에서 잠시의 위로가 돼 줄 수 있기만을 바라며.

 

작가노트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화면의 분할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화면의 분할은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던 색상들도 묘하게 세련된 조합을 이뤄내주기도 하고 각각의 색상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이와 반대로 잘못된 면분할로 인해서 무난하게 잘 어울리던 색상의 조합들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마치 사람간의 관계와 같다. 점의 크기와 간격 선과 면의 비례… 쪼개진 면적들을 펼쳐놓고 색을 배치하는 이 모든 과정들은 철저히 계산된 작업이다.

김정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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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열림, 확장의 내러티브

상실로 비워지고 멈춤으로 열리는 애도의 내러티브

 

김정린 작가의 이번 작품은 첫 번째 전시 이후 상당한 변화를 보여준다. 첫 번째 전시 작품들은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정원, 깊은 정글 속 야생동물들이 어우러져 우리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다시 만난 그녀의 작품은 진공과도 같았던 오래된 시간만큼 사유된 세계에 대한 성찰을 담으면서 면과 색으로 단순화되었다.

작품 ‘오월’은 그 첫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가 시작되던 무렵,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걱정과 슬픔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오던 작가의 눈앞에 오월의 초록이 펼쳐졌다. 이전에는 그닥 눈에 담아두지 않았던, 도로를 품은 거대한 산은 그녀의 전경으로 들어왔고 모성원형으로써의 산은 헛헛했던 작가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건축을 전공했던 아들이 만든 집 구조물들을 향했다. 벽들이 공간을 나누고 분할된 공간이 다시 연결되는, 단절과 연결의 리듬을 타고 작가는 아들의 모형 구조물 사이사이 공간에 집중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블럭을 해체하고 이리저리 재조합하듯, 아들의 공간을 평면의 캔버스로 옮겨 제 4, 제 5의 공간을 삽입한다. 이로써 아들의 건축물은 그녀의 캔버스에서 완전히 다른 깊이와 층을 지닌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도처에 임박했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맞서야 하는 실존적 과제를 직면하게 했다. 소중한 것을 잃는 중에도 대체할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결핍은 창조성을 발현시키는 조건으로, 그동안 당연히 여겼던 자연과 현상들을 회의하고 괄호치기하는 판단중지와 함께 열어젖힘의 통과의례적 과정을 수반한다. 이 과정에서 김정린 작가는 존재에 대한 허무주의로 귀착되어 모든 의미를 배제한 형식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초월적 성찰로 캔버스 위의 수많은 배경과 차이가 사라지고 가장 본질적인 색과 면의 단순함에 다다른다. 이러한 김정린 작가의 현상학적 태도와 작업은 한때의 재현주의적 공간, 즉 르네상스적 환영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숭고라는 주제에 몰입했던 추상표현주의자, 바넷 뉴먼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뉴먼의 zip이 캔버스 위의 장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진동을 통해 숭고의 주제를 표현했던 것처럼 김정린 작가의 작품 속 색면들이 미세한 밫을 만든다. 그리고 반복과 연속의 장 한 편에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삽입된 면들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입체적 공간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이는 원근법의 르네상스적 공간과 다르다. 건축물 구조에서 시작되었으나 해체되고 색면으로 재조합되어 이루어진 공간으로써, 다른 종류의 ‘깊이’를 전달한다. 게다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점 형태의 오브제들이 캔버스 밖으로 도출되어 있어 빛의 방향에 따라 미세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낯선 공간과 캔버스 표면의 공간들, 그리고 캔버스 밖으로 도출된 공간, 얼핏 보면 놓칠 수 있는 색들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빛을 응시하는 것은 마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실존적 의미를 포착하는 ‘멈춤’의 시간과도 같다. 이러한 응시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살아낼 의미를 더할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기에 작가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감각적 즐거움도 놓치지 않고자 한다. 그래서 작가는 색과 면이 주는 즐거움과 가벼움, 그리고 무거움을 함께 고려한다. 인생의 추가 무겁게 가라앉을 때는 잠시 숨돌릴 유머가, 그저 가볍다고만 느낄 때는 묵직한 시선이 필요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랴. 그리하여 작가는 더더욱 치밀한 강박을 요구하는 작업으로 캔버스를 마주한다. 치밀한 계산으로 캔버스를 나누어 연속적으로, 불연속적으로 오브제들을 배열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캔버스에 물감을 얇게 바른다. 자칫 계산이 한 번이라도 잘못되면 전체가 잘못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말이다. 이전보다 한층 깊어진 작가의 성찰과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김정린 작가의 이번 작업의 궁극적 의미는 애도(mourning)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상실로 비워지고 멈춤으로 열리는 공간과 색들의 울림…..그래서 김정린 작가의 애도의 내러티브는 오늘도 각기 다른 상실을 앓고 있을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마치 작가의 캔버스 위, 미세한 수많은 장들의 울림처럼 말이다.

 

 

최승이(숙명여대 심리치료대학원 미술치료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