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오 개인전 오름의 향기

김성오
2019 11/06 – 11/11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나의 이어도 「오름」

내 그림의 핵심주제는 오름이다.
유년시절 테우리였던 아버지와 잠시나마 경험했던 수산리 마을공동목장에서의 테우리에 대한 경험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나의 고향인 원동에서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지만 단편적 기억으로 짤막짤막하게 남아있다. 산간에 위치한 동네의 가구 수라고 해봐야 우리 집을 포함해서 네 가구에 불과한 탓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기회는 없었다. 가끔씩 공동목장에 맡긴 자신의 소를 보기위해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내가 볼 수 있던 건 삼나무 숲과 밤나무 밭 그리고 우리 집 돌담 울타리 넘어 펼쳐진 초원, 그 위에 부드럽게 솟은 오름 들이었다. 자연스레 자연은 나의 놀이터이자 벗이 되었다.

현재 작업실이 있는 하가리로 우리가족이 마지막으로 이사를 하고나서도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서 테우리를 하셨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계신 목장으로 가는 길은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그 길은 유년의 나에게는 이어도로 가는 길이었다. 나의 이어도. 360도 사방으로 막힘없이 펼쳐진 목장과 그 가운데 볼록 솟은 알오름 같은 언덕꼭대기, 자연암반을 의지 삼아 지어진 테우리막, 그 위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경이로움. 그것은 분명 이어도였다.

목장멀리 주변을 둘러싼 오름들과 강렬하게 떠오르고 또 사라지는 태양과 뒤를 이어 하나, 둘 펼쳐지기 시작하는 밤의 환상, 별들의 유희는 어린 마음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씩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퍼지는 송아지를 떠나보낸 어미 소의 애처로운 울음은 오랫동안 나에게 테우리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오름을 오르는 것은 유년의 삶에 녹아들어 형성된 기억과 감성들을 깨우는 일이다. 그 것들이 되살아나 작품의 근간이 된다.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테우리의 꿈은 오름 속에 숨겨진 생성의 비밀과도 연결된다. 내가 붉은색을 좋아하고 자주 쓰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붉은색을 통해서 새 생명의 탄생과 그 강렬한 에너지를 표현하려 했다.
오름의 탄생은 생명의 근원인 화산의 이글거리는 불구덩이를 심장에 품고 있다. 불과 생명, 그리고 강렬한 에너지로 만들어진 화산섬. 누군가가 나에게 제주의 색이 무슨 색일까? 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붉은 색이라고 할 것이다. 캠퍼스 바탕의 붉은색은 오름 생성의 근원이 되는 색이다. 그 위에 다시 색을 입히고 날카로운 칼로 긁어내기를 반복하면서 붉은색의 선들이 수없이 모여 꿈틀대고 흐르면서 제주 오름과 평원에 새 생명을 준다. 사람의 몸 안에 수많은 실핏줄이 흐르면서 생명을 유지하듯 오름 또한 그 안에 수많은 실핏줄이 흐르며 현재의 오름이 되었다고 본다. 또한 미세한 선들은 제주 땅의 푸석푸석한 지질의 표현이며, 바람의 흐름이기도하다. 오름 속에는 나만의 이어도가 있다. 거친 삶 속에 고달픔을 억척스럽게 이겨내 온 제주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향인 이어도가 있었듯 나에게는 나만의 이어도, 즉 실제 오름과 지형을 참고해 작업하지만 그림 상에 오름들은 현실과 떨어져있는 오름과 지형들이다. 수많은 선들을 통해 형태를 왜곡하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하면서 몽환적 상상도, 이어도를 만들어 간다.

나는 오늘도 오름을 오른다.

그 곳에 나의 이어도가 있다.


오름 선으로 살아나는 유년의 꿈

-김성오의 작품세계-

전 은 자/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오름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하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비유가 인성(人性)의 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선과 악은 자연과 상관없는 인간의 사회적 판단이다. 한 시대의 어떤 가치란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제도를 통해서 규정된다. 결국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Ideology)로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눈으로 봐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인습적 가치로 자연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판단은 인간의 생각과 이해에 불과하다. 오름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또한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름은 계절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온통 누런빛으로 겨울이 물들면 오름 위의 소나무는 매서운 바람에 머리를 휘청거리며 시린 소리를 낸다.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바람에 눈을 뜬 오름은 나른한 오후를 즐긴다. 여름이 되면 오름은 싱싱한 풀로 마소를 보듬는다. 가을은 오름 위에 솜털구름을 걸쳐놓는다. 억새가 술렁이는 오름 아랫길로 소 무리가 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름의 사계절은 이렇게 돌고 돈다.

오름 아래에는 여러 개의 습지가 있다. 오름 아래의 물통은 테우리(牧童)의 쉼터이자 마소들이 물을 마시는 곳이다. 물통은 사람과 마소만이 아니라 들녘에 사는 새들과 미물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유년의 기억, 그리고 꿈

김성오에게 오름은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유년시절의 낯익은 놀이터이다. 또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준 은인으로서의 대지이기도 하다. 캔버스 위에 새겨진 기억의 선(線)들은 김성오의 인성(人性)과 긴밀하게 닿아 있다. 삶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것처럼 김성오는 마치 조각난 기억을 조립하듯 캔버스 위로 오름의 선을 켜켜이 쌓아간다. 삶의 병렬적인 관계들, 일상의 선들이 모여 새로운 오름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오름에서 보았던 유년의 기억은 숨 가쁘게 불어오던 강한 바람, 야생초들의 향기, 하늘 위로 흩어지는 소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이런 기억의 근저에는 소테우리 아버지가 있었다.

김성오의 오름은 형상적 인식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새로운 형상을 찾기 위해 씨름하게 되는데, 독자적으로 일구어낸 형상에는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꿈이 깃들어 있다. 이제 김성오의 유년의 꿈은 오름 선으로 완성되고 있다. 오름을 오르던 유년의 작은 걸음걸이가 지층이 되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김성오 그림의 원시성, 긁기

김성오의 초기 그림은 우리들이 늘 보아오던 풍경으로서의 오름이었다. 자연 풍경은 자연미를 최상으로 한다.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대상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이 자연미이다. 그러나 예술미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되 인간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미를 말한다.

김성오가 칼로 긁는 작업을 선택한 것은 미에 대한 재해석, 즉 대상을 보는 감정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로 긁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고를 요한다. 켜켜이 긁어가는 시간은 마소들에게 풀을 먹이는 테우리의 기다림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긁는 기법은 칠하는 기법보다 입체감을 살리기도 어렵다. 이미 계산 된 밑바탕의 색을 드러내는 것은 유적의 발굴과도 같이 조심스런 작업이다. 이런 김성오의 긁기 작업은 미의 발굴이자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단층의 작업이기도 하다.

붉은 색으로 표현되는 김성오의 원시성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원생적 화산의 느낌과 함께 화산섬의 지질 구조를 연상시키는 긁기 작업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김성오의 작업은 캔버스 안에 자신의 목장, 즉 이어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