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 개인전
한영주
2025 09/03 – 09/08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그 얼굴 그 모습…
그 얼굴 그 모습, 그 웃음 그 눈동자
그리워 못 잊어 울먹이는 나…
오랜만에 걸어둔 CD에선 여고 시절에 만난 노래가 흘러나오고,
내 손엔 식은 커피 한 잔,
그리고 내 앞 물레 위엔 나의 손끝을 기다리는 흙 한 덩이…
항상 머릿속 구상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작업이 어떨 땐 어이없기도 하지만
예상 밖 모습으로 와주기도 해 다른 기쁨이 되기도 한다.
물레 위에 한 여자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다.
순간 나를 보는 듯해 부끄러워 눈매를 고쳐준다.
내 기억 속의 엄마의 모습은 그냥 웃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나였음 좋겠고, 나의 작업의 한 장면이었음 좋겠다.
오늘은 불현듯 어린 시절 엄마의 기쁜 마음이 더해져 만들어진 주황색 책가방이 생각났다.
무채색이 일색이었던 어린 시절 그 주황색은 내겐 큰 호사였고, 신세계였다.
5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 낡은 기억 속 명료함에
오렌지색을 집어든다.
아이의 원피스가 어느새 오렌지색으로 물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아이의 미소는
한 잎 한 잎 하얀색 꽃이 되어 치마 위에 날아와 앉는다.
이 또한 나였음 좋겠다.
한영주의 도예작품과의 첫 대면은 십여 년 전 인사동의 한 전시실에서였다. 현대 페미니즘 여성작가인가? 궁금해하면서, 작품들의 모티프가 거의 아낙, 소녀, 꽃 등 여성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기성작가와는 다른 묘한 낯섦(uncanny), 아니 무언가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느낌을 받으며 그 실체가 무엇일까 고뇌한 적이 있었다. 단순한 여성성 속에서도 전체적으로 펼쳐지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아련하고도 애잔한 울림장이 있었다. 그 속에는 시각예술로는 표현키 어려운 잔향(殘香)이 있었다.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는‘예술이 단순한 장식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감동에 바탕을 둔 내적 필연성이 있어야 하며, 예술가가 느낀 감동이 감각적으로 조형화되어 관객의 감동에 전달되는 쌍방의 상호작용이 없으면 예술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뒤 십여 년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순수한 예술혼을 잃지 않고 치열한 조형의식으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간 작가를 지켜보면서 상기한 낯섦의 비밀 열쇠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우선 작가는 물질화되고 육화(肉化)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한국 전통 여성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작업하였다. 코일링 기법과 성형을 다하고 속을 파서 다시 접합시키는 속파기 작업을 통해 한층 한층 시각을 넘어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Die Unsichtbare Stimmung)까지 다가가며, 가마 속 고온에 자신을 맡기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가마를 열 때면 기대와 탄식 속에 미소 짓곤 했다. 오래전 엄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아낙과 어린이의 모습으로 열려 나왔다. 과거는 현재 속에 융해되어 묘한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의 작품 전체에 뿌리내려있는 심층 의식은 현대사회 전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페미니즘과는 결을 달리하며, 건강한 시간 여행을 하며 긍정적인 자애로움을 체화하고 있다.
코로나라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전시되는 이번 작품들은 이러한 작가의 조형의식이 고도로 응축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구현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보다 진일보한 작품세계 구현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기(期)의 작품군(群)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추억 속의 아름다움이나 그리움 등을 내면으로 표현 이동하여, 작가 특유의 애잔한 정감으로 생명력을 불러 넣어주고 있는 양태가 여러 면에서 거의 정점에 달한 듯해서이다. 애정을 가지고 올곧게 한 방향으로 다가가고 또 다가가면 저절로 알아지는 법일까? 이제 작가는 조형의식을 일상적인 시각을 넘어 촉각, 청각 등 공감각으로까지 깊이 있게 두레박질하는 ‘조촐하지만 설레는’ 내공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평론가 이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