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와우회 단체전 민화, 같은:다른

홍익와우회
2024 09/04 – 09/10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따뜻한 그림, 민화를 찾는 사람들

–홍익와우회전에 부쳐–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민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예사롭지 않다. 이를 하나의 현상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실체라 확인하기도 한다. 그만큼 민화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고, 전시 등 민화관련 활동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교육의 확대에 따른 민화 인구의 증가를 주요 원인으로 꼽곤 한다. 문화 향유 기회의 확대와 이에 따른 직접적 참여 의지의 발현이 바로 오늘의 현상을 만든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성된 새로운 문화 환경 때문일 것이다. 문화의 속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민화의 붐이 하나의 실체라 한다면, 그 내용은 단지 민화 인구의 증가와 활동의 빈번함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비록 활발하다 하지만 전체 미술인구와 활동 공간을 살펴본다면 민화는 여전히 주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의 실체로 확인되는 것은 민화가 가진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21세기의 현대미술은 이미 주도적인 이즘이나 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화, 다변화된 현대미술의 공간 속에서는 대세를 이루는 보편적 가치를 대신하여 차별성, 지역성, 특수성 등의 가치가 더욱 존중 받는다. 민화가 실체로 다가온다는 점은 바로 민화가 우리미술의 특수성과 차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유력한 형식이라는 점에 대한 확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민화의 특수성을 형식으로 수용할 것이냐, 혹은 내용으로 이해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주지하듯이 민화는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독특한 형식이다. 사실 민화는 이른바 정통 회화의 변형이다. 즉 지배층 계급이 독점적으로 향유했던 고급문화를 서민적 시각과 입장에서 변형 수용한 것이다. 이는 전통시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종종 나타났던 아속공상(雅俗共賞)의 한 예이다. 즉 지배계층의 우아한 문화와 서민계층의 속된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의 융합이다. 이를 통해 전에 없던 민화라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민화의 탄생은 당연히 그것이 속한 시대적 배경,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화는 당연히 조선 후기라는 당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의 미술인 셈이다. 21세기의 오늘, 만약 민화를 당시에 구축된 형식으로만 이해하고 이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고착시킨다면 민화는 고루한 형식주의의 나락에 빠지고 말 것이다. 민화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내었다면, 현대 민화는 당연히 현대라는 시공의 상황과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식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화를 내용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정통미술이 인문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공적인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민화는 극히 개인적인 욕구와 바람을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출한다. 민화는 신분에 따른 엄혹한 계급사회에서 서민들이 꿈꿀 수 있었던 출구이자 비밀스러운 부적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민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상징과 이야기들은 그 염원을 형상을 통해 구체화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민화는 꿈꿀 수 없는 신분사회에서 서민들의 꿈과 염원을 보듬어 준 따뜻한 그림인 셈이다. 사실 민화의 가장 큰 가치는 이에 있다 할 것이다.

이에 이르면 오늘날의 시대 환경은 당연히 조선시대와 다르며, 서민들의 꿈과 염원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화속의 상징과 의미를 추종하며 현대 민화를 표방함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늘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상향을 꿈꾼다. 민화를 서민들을 보듬어 주었던 것이라면 점을 상기한다면, 당연히 새로운 내용으로 새로운 시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민화의 창출이 필요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21세기의 문화 환경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단 문화를 주도하던 보편성의 가치는 쇠퇴하고 특수성, 차별성, 지역성의 의미가 강조되고 존중되는 때이다. 과거 우리의 정통미술이 일정 부분 중국이나 일본, 혹은 서구의 현대미술을 추종하고 지향한 바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민화는 참으로 어렵사리 싹을 틔운 여리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새삼 민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부름이자 요구라 할 것이다. 전통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수혈하며 그 내용을 풍부히 하며 생명력을 이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우리 것에 대한 공부와 연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화는 바로 우리의 특수성을 통해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임이 분명하다.

홍익와우회가 서로 다른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내용들에 대한 공감과 확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당연히 전통답습의 형식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이 여실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조형을 익히고,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민화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하고 다변하다. 이미 축적된 경험과 이해가 있기에 과감하고 거침이 없다. 그룹을 이뤄 동일한 목표와 지향을 연구하고 모색함은 유익한 방법이다. 서로의 견해와 성취를 공유하고 공통의 가치를 보다 뚜렷이 확인해 나감에 있어 그룹, 혹은 집단의 공통된 노력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향후 민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시대에 대한 진지한 해석, 그리고 이의 표현 등에 이르기 까지 진지하고 치열한 모색과 논의는 구성원 개인에게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소중한 덕목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옛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의 목적은 새로운 것의 창출에 있다는 점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스스로의 분야에서 작업의 경험을 충분히 축적한 이들이기에 창작의 중요성과 그 어려움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쉽게 제기되는 문제점의 지적 등에 대한 시중의 비판을 상기하며, 홍익와우회전의 성취와 노력을 통해 그것이 불식될 수 있는 계기가 확인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