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수 개인전 여기, 머물 곳이 없을지라도...

안문수
2022 10/12 – 10/17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노트

흑암과 혼돈 가운데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 빛과 어두움이, 땅과 하늘이 나뉘었으며 낮과 밤이, 바다와 육지에 경계가 만들어졌고 생명이 있게 되었다. 생명은 질서 안에서 존재하며, 성장하고 확장되어 간다. 그러므로 존재의 근원은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근원자에게 있다.

이 세계와 인간은 질서 안에서 소통하고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 존재자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비극은 질서의 상실로부터 시작되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은 소멸 되어 갔으며 사랑의 대상은 경쟁과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인간은 앙망해야 할 대상인 신이 되고 싶은 욕망에 스스로 혼돈과 흑암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살아있으나 생명이 없는 세계로 들어갔다.

 

질서를 상실한 세계는 공허하다. 개인의 삶 또한 하나의 기준을 갖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개개인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독립된 ‘나’로 살아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사조는 인간 스스로 소외된 상태로 만들고 말았다. 열린 세계에서 닫힌 세계로, 무한한 시공간에서 유한한 시공간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인간의 감정 또한 평안과 사랑보다는 불안과 비극성을 갖게 되었다.

유한한 시공간에서의 생명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태어나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죽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나의 삶에서 확정된 것은 죽음뿐이다. 단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나는 삶과 죽음 어디에도 안정적으로 속하지 못하고 늘 그 문턱에서 서성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세계를 마주하는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왜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고통을 허락하였을까? 자신과 형상과 닮게 만든 인간에게 비통한 삶을 허락하였을까?

타자의 고통과 비극은 내 안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한 감정,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두움의 동굴을 걸어 가는듯한 막막함, 형언할 수 없는 불안, 분노, 두려움, 폭력성 등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감정들 -물론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 내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져가고 내 삶을 지배하지만 나 스스로 조종하고 잠재울 수 없다.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침묵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침묵은 수많은 말을 가두어 놓고 있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 밖으로 나온 말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나는 점을 찍는다. 반복적으로 점을 쌓아 올린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듯하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말들을, 침묵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그 많은 말들을 침묵 안으로 돌려보내기 위하여 점을 찍는다.

 

나의 능력으로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무질서한 감정 앞에서 나는 무능력하다. 나에게 주어진 길의 끝은 어디일까? 이 길 끝에는 또 다른 길이 있을까? 나는 질서와 혼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상상할 뿐이다.

나는 허공에 문을 만든다. 문은 열려있으나. 안을 볼 수는 없다. 그 문을 통하여 내가 가든지 저쪽에서 그 무엇이 오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