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현 개인전 DECOMPOSITION
Kim Chanhyun
2021 01/13 – 01/18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컴포지션, 디컴포지션, 어태치먼트의 조형세계
황인(미술평론가)
김찬현은 두 개의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하나는 판화작업으로 작품 명제는 디컴포지션(Decomposition)이다. 또 다른 하나는 테이프 드로잉 작업으로 작품 명제는 어태치먼트(Attachment)이다.
분해, 해체를 뜻하는 디컴포지션과 부착, 연결을 뜻하는 어태치먼트는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디컴포지션의 본향은 컴포지션(구성)이다. 김찬현의 작업에서는 컴포지션, 어태치먼트, 디컴포지션이란 어휘들이 서로 독립되지 않고 상호 관계 항을 이룬다. 이 어휘들이 김찬현의 작업에서 어떤 의미와 자격, 역할을 가지는가를 파악하는 일은 그녀의 작품세계의 요체와 진면목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컴포지션은 특별할 것도 없는 미술용어다. 컴포지션이란 제명을 붙인 선배작가들은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 구성(supermartist composition), 세르쥬 폴리아코프의 추상 구성(composition abstraite) 등이 그렇다.
그러나 김찬현은 선배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의 컴포지션(구성)을 창안하기 위해 굳이 디컴포지션이란 제명을 끌어다 붙였다. 절대주의 구성이나 추상 구성에서는 형태의 환원으로서의 구성만 보인다. 폴리아코프의 추상 구성의 경우 시간의 선형적 질서를 따르는 음의 흐름(컴포지션=작곡)을 색채의 장소적인 배치(컴포지션=구성)의 세계로 치환함에 머물고 있다(러시아혁명 때 파리로 망명한 폴리아코프는 기타리스트 생활을 거쳐 화가로 전향, 이후 칸딘스키를 안 후 추상화가로 변신함). 즉 시간의 사태가 장소의 사태로 전환하기는 했으나 절대적인 환원에 이르러 공간적인 질서로 재배치되는 상태에까지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말레비치의 경우 절대적인 환원의 세계에 도달하였으나 환원 이후의 새로운 사태가 보이지 않는다.
김찬현은 디컴포지션이란 명제를 끌어와 환원의 과정은 물론 이 환원의 과정에서 빚어진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들이 리컴포지션(재구성 recomposition)되면서 구축되는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한다. 더욱 확장된 컴포지션을 위해서 그에겐 컴포지션, 디컴포지션, 리컴포지션 모두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명 디컴포지션은 단순히 컴포지션의 분해,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고 확장된 컴포지션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그의 판화작업 제명인 디컴포지션의 유의어로 환원과 미분이 있고, 그의 드로잉 작업 제명인 어태치먼트의 유의어로는 통섭과 적분이 있다. 수학자에게 세계는 미분으로 기술되고 적분으로 독해된다. 여기서 미분의 자리에 디컴포지션을 적분의 자리에 어태치먼트를 넣어도 대의는 크게 바뀌지가 않는다. 이번에는 ‘세계’를 ‘미술’로 바꾸어 보자. ‘미술은 미분으로 기술되고 적분으로 독해된다’ 혹은 ‘미술은 디컴포지션으로 기술되고 어태치먼트로 독해된다’라는 사적 정의가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개념미술, 미니멀 아트 등을 수행하는 매우 극소수의 작가들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미분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현상을 환원하여 현상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을 추출해내거나 현상의 움직임에 나타난 변수적 요소들을 상수값으로 치환하여 미래를 예측해내는 작업에 유효하다. 그리고 미분으로 추출된 본질의 상태를 지각이 수용할 수 있는 현상으로 다시 드러내는 작업이 적분의 프로세스다. 물을 환원하면 산소와 수소로 분해되고 그 산소와 수소를 다시 결합하면 물이 된다, 조형을 환원하면 무엇이 등장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결과물을 다시 결합하면 어떤 새로운 조형이 나오는가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김찬현은 이러한 궁금증을 갖고 디컴포지션이란 프로세스를 통해 조형의 환원과 통섭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다색판화의 경우 분판 작업은 색채의 미분 작업으로 부를 수도 있다. 여기에다 형태를 기하학적인 질서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형태의 미분화작업에 해당한다. 판화의 경우 장르의 특성상 색채를 미분화하는 것, 판의 제작을 쉽게 하기 위해 형태를 간결하게 처리하는 것 즉, 압축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환원하는 과정과 이들을 다시 판수를 늘여가며 재구성하는 적분의 작업이 늘 동반되었다. 미분과 적분 작업은 판화의 운명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판화의 이러한 운명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디컴포지션이란 구체적인 명제를 내세워 명시적으로 드러내려 하는 시도는 김찬현의 작업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김찬현은 몇 년 전 처음으로 조형적 대상으로서 창문을 주목했다. 서양미술사에서 흔히 회화를 설명할 때 창문을 등장시키곤 한다. 이때 창문은 건물 바깥에 놓인 대상과 건물 내부의 주체 사이에 놓이게 된다. 대상과 창과 주체 사이에는 원근법적 질서가 성립한다. 창에 비친 대상과 세계를 그대로 화면으로 떠내면 그림이 된다. 그런데 김찬현의 경우는 반대로 건물 바깥에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대상 그 자체가 된 셈이다. 그 결과 원근법적 질서의 무화(無化)되었고 화면은 평면화를 향했다. 평면적인 화면에 남은 창틀의 기하학적인 구조는 극명한 수학적 공간적 질서로 상승했다. 이때가 2019년이다.
작품상의 조형적 질서가 수학적 공간적 질서로 편입되면 장소성이 내포된 작품들의 공통적 특성인 중력(그라비티)이 상실된다. 여기서는 중력을 기준으로 형성된 수직과 수평의 기준은 더이상 무효하다. 형식적으로는 수직, 수평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인 무중력 상태의 XY좌표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드디어 작품에서 상하좌우의 구분은 희박해지고 만다.
디컴포지션 시리즈 중 최신작은 6개의 화면이 합쳐진 180×300cm 사이즈의 대형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세로와 가로, 상하를 무시하고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작품의 조형성이 어색하지가 않다. 만일 작품에 그라비티가 존재한다고 하면 신체가 지각하는 시각적 그라비티와 일치해야만 작품이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라비티가 없는 작업은 작가의 신체는 물론 관람자(觀覽者)의 신체의 장소적 지각과 무관하다. 특정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그라비티로부터 자유롭기에 그림의 방향성 또한 자유롭다. 이러한 경지는 말레비치의 절대 구성을 방불케 한다.
김찬현이 디컴포지션 작업을 통해서 미술의 환원과 미분을 어태치먼트 작업을 통해서 미술의 통섭과 적분 작업을 하고 있으리라는 가정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그의 실크스크린 판화 디컴포지션 작업은 실은 그의 테이프 드로잉 어태치먼트 작업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물론 이 반대의 상황도 있다. 그의 디컴포지션이 컴포지션을 포섭하듯, 디컴포지션 작업과 어태치먼트 작업은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고 있다. 미분 작업과 적분 작업의 상호포섭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테이프 드로잉 어태치먼트 작업에 등장하는 테이프, 스티커 등은 청계천, 을지로의 자재상가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테이프, 스티커는 작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중의 수요를 감안하여 몇 개의 규격 즉, 일정한 모듈과 기하학적 질서로 환원된 오브제다. 그 제한적인 규격은 작품의 미래를 어느 정도 결정한다. 테이프의 특성상 테이프를 붙이는 순간 조형상의 선의 방향은 정해진다. 화면상에서 선의 방향은 추리되고 예측(predict 미리 pre, 기술됨 dict)된다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지성은 판단하지만 이성은 추리한다’는 질 들뢰즈의 언설이 적절하게 개입된다. 모든 예측과 추리의 세계는 이성과 인식이 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적 성향은 대개는 공간성을 지향한다. 공간성을 지향하는 만큼 장소성은 줄어들고 또 그만큼 주체는 무명화된다.
통상 드로잉은 손으로 한다. 작가의 아이디어로 떠도는 이미지를 심상으로 잡아내어 일인칭을 대행하는 작가의 손으로 이 세계에 토해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없음을 손을 통해 있음으로 이끄는 것이 드로잉이라면, 김찬현의 테이프 드로잉 어태치먼트는 이와는 달리 테이프와 스티커라고 하는 기성품(旣成品), 즉 이미 만들어진 세계 혹은 이미 있음을 새로운 있음으로 이끄는 행위다. 이는 일인칭인 나를 무명(無名)으로 희박화시키며 세계를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나는 무명일진대, 세상은 이미 깨어나 있다고 하는 종교적 각성에 가까운 경지다.
작가라는 주체를 강화하여 표현의 주체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될 수 있는대로 무력화하거나 에고를 버린 무명으로 이끌어 모듈의 질서 즉, 세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김찬현의 특장이다.
판화 디컴포지션과 드로잉 어태치먼트는 다른 작업인 듯하면서도 실상은 같은 개념의 작업이다. 이 둘은 미분과 적분, 환원과 통섭, 분석과 종합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는 작업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드로잉 작업의 아이디어가 판화작업으로, 판화작업의 사유가 드로잉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미분, 환원, 분석의 결과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재배치될 수 있는 균질공간의 인식과 확보에 있다.
그러나 김찬현의 작업세계가 완전히 공간적이거나 기하학적인 것은 아니다. 장소 상에서 벌어지는 외부적 이미지, 천 주름과 같은 물성의 감각을 작품 속에 도입하기 위해 실크스크린 혹은 시트 작업을 하여 판화 작품과 드로잉 작품 속에 부분적으로 틈입시킨다. 공간적 질서에 장소적 변성을 넣는 행위다. 변성 역시 큰 범위에서는 디컴포지션의 일종에 해당한다.
김찬현의 작업은 판화와 드로잉 모두 매우 기하학적 질서를 가진 단순한 모듈 혹은 형태들의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가 단순하거나 모듈로 구조화되어있을수록 재구성하기가 쉽고 또 무한증식의 가능성이 커진다. 김찬현의 작가적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