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안 개인전 Just a Cake - Piece of Hope

권지안
2021 03/03 – 03/08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권지안 개인전 ‘Just a Cake – Piece of Hope’ 기획 의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관심사를 드러내기에 바쁘다. 특히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거의 ‘광풍’ 수준의 문화 바람을 일으킨다. 어쩌면 우리의 동향 자체가 광풍적 참여를 일삼는지도 모른다. 권지안의 작업 또한 마치 하나의 트렌드처럼, 날카로운 비난 속 논란의 대상으로 항간에 오르내리면서 그녀 스스로 감내해야 할 아픔과 상처는 가중되었다. 그러나 이 상처가, 작업물의 기저(基底)로 태동하면서, 오히려 끊임없이 그녀를 추궁하는 네가티즌의 존재 자체가 창작의 모티브로 전환하는 모순을 낳았다. 문화의 시류와 역사는 이러한 상처에 기반한다. 상처가, 그녀의 벌어짐이 고통의 흔적이자 틈을 남긴다. 결국 권지안 자체가 ‘틈’이다. 왜 그런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미학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현대예술의 본거지로서 낭만주의 미학을 틔웠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미적 능력이자 선험적인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권지안의 케이크는, 이와 같은 미적 쾌감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선험적 원리로부터 시작한 작업이다. 때문에 ‘케이크 표절’이라는 악성루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고, 획일화된 대중의 시선과 편협한 관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차이를 우리의 지각이 동일한 의식 체계 안으로 끌어들인 결과, 한결같이 인식되었다. 고로 대중은 감성적 보편성과 필연성에 바탕을 둔 그것의 사건적 관점을 죄악시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권지안의 작품에만 집중해보자. 있는 그대로의 차이를 인식해보자. 예술작품의 고유성은 각각의 예술품이 구현해내는 절대적인 차이 속에서 발생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게 예술은 ‘욕망’ 그 자체인데, 다시 말해 무수한 코스모스들이 형성될 ‘잠재태’를 품고 있다. 놀이는 기존의 통념들로 세습화(世習化)되는 사유의 고리를 잠재태가 비튼 결과에서 발원 하듯이, 권지안은 ‘놀이’한다. 놀이하는 그녀 자체의 움직임은, 어떤 이해관계나 사회적 기준과 무관하게 자기 자신이 만족을 느끼는 대상에서 출발하여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저항하는 욕망의 운동이다.

  권지안은 양초가 지닌 실용적 고유성에 국한되지 않고, 성분이 굳어지기 전의 상태인 잠재태, 즉 ‘가능성의 지대’로 다시 역행하여 또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요청하는 장소를 불러온다. 이것이 권지안의 해프닝이다. 이렇듯 예술가의 존재 지평을 넓히는 그녀의 창작욕은, 들뢰즈가 말하는 인간이 예술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자 예술의 존재 방식이다. 또한, 질타 속 자유롭지 못한 자기 자신의 현실과 이상적인 미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을 좁히려는 작가로서의 실현적 행위이며, 존재론적 ‘사건’의 체험이다. 결과적으로,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태가 일으킨 문화 현상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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