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복 개인전 칠(漆)흑에 새긴 빛 – 옻칠화
정광복
2020 05/27 – 06/08
2 전시장 (2F)
칠(漆)흑에 새긴 빛 – 옻칠화
작가노트
시각 예술은 예술이라는 개념의 한 부분으로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다.’의 의미를 가진 회화(繪畵)라 일컬으며 지금까지 발전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눈으로만 감상하는 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나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오감 모두를 자극하는 한편 행위, 이미지가 없는 생각마저도 예술로 귀결되어 종합예술형태로 귀속되는 시대이다. 이런 급변화 시대성에도 불구하고 옻칠화를 재료로 국한시켜 종합예술형태로 바라보지 않고 공예가들이 마치 예술가에 대한 숭고함을 갖추려 하는 욕망이라고 치부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재료는 현대미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재료의 종류, 가공방법, 제작과정, 숙련도 차이에 의해 이미지가 달라지고 내용마저 달라지게 된다.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피카소의 황소, 뒤상의 샘 작품은 재료의 선택, 변화, 가공에 의해 제작하였는데 이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재료의 확장이라는 변화를 가져온다. 초기의 재료 사용은 단순한 가공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하지만 현대미술은 매우 정교한 가공과 복잡한 제작과정의 발전된 형태를 가지고 정교한 규칙, 계산과 함께 기술(육체)등의 장인 수식어를 포함시킨다. 재료의 선택, 활용 방법과 수준에 의해 현대미술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미술을 개념과 이미지로만 생각한다면 미술의 전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옻칠화는 재료의 확장 영역에 있음은 물론이고 정교한 가공, 복잡한 제작과정을 모두 내포하는 장인 수식어를 포함하고 있다. 재료 혹은 공예의 한계라는 인식의 벽을 허물고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으로 바라보길 희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십여 년의 창작 연구를 통해 예(藝) 와 기(技)를 겸하게 됐다. 예(藝)는 조형적 능력을 의미하고 기(技)는 장인의 수식어를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예와 기는 창작에 있어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일정한 수준 이상에 도달한 기는 예를 결정하는 한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와 기는 내용, 형식과 같이 옻칠화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항목이다. 오랜 시간 수 많은 옻칠예술가들에 의해 발전된 기(技)를 계승하여 현대미술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표현 연구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성한 예술인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藝), 기(技) 두 요소를 기반으로 한 창작 연구를 통해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정립하였다. 조합과 변형은 재료의 조합, 기법의 조합, 기법 재료의 조합, 기법의 변형을 의미한다. 창작에 있어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는데 조합과 변형이 효과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이질감의 생성으로 화면 전체의 통일감과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도출한다. 효과적인 수반이라 함은 조합 변형이라는 조형 능력의 숙련 정도를 의미한다. 또한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통해 계승, 발전, 창신(創新)이라는 창조 정신을 정립하였다. 이는 서양의 창조 정신과는 다른 창조 정신으로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두 사자성어로 쉽게 풀이될 수 있다. 옛것을 부정, 파괴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서양식의 이분법적인 창조 정신과는 대립 되는 이념으로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 구축 정신을 예술관으로 삼고 있다. 서양식의 이분법적인 창조 정신을 반증하기 위해 상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인 조형 요소로 하나의 자유로운 화면을 만든다. 직선과 곡선, 사각형과 원형의 간단한 요소 외에도 상반, 대립되는 개념의 요소들을 사용하였다. 나무를 부착하고 그 위에 옻칠하여 실제 문, 창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마치 실제 오브제 안에 그림이 담겨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실존과 허구의 상반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구상과 추상, 정형화된 도형의 형상과 비정형의 형상, 단순화된 블라인드 형상과 창문 형상 역시 안과 밖, 개방과 폐쇄라는 상반, 대립 되는 의미의 구성요소로 사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전통 창살 문 형상이 작품에 나타나기 전에는 크고 작은 소통의 창을 의미하는 사각 프레임이 등장하였다. 이는 전통 창살 문의 연속이다. 예술적 가치의 내용을 크고 작은 창을 통해 창 밖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외침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창을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외침에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을 활짝 열어 진정한 옻칠화 예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각 프레임과 전통 창살 문은 소통의 창구라는 의미 외에도 작가 개인에게 있어 소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팔레트를 의미한다.
‘칠흑과 같은 어둠’ 에서 칠흑은 흑칠(黑漆 – 검은색 옻칠)에서 유래되었다. 흑칠은 그 어떤 흑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한 줄기의 빛도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진 캔버스에 빛을 비춰 세상을 밝히는 옻칠화를 ‘칠(漆)흑에 새긴 빛’ 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