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 개인전

이형로
2025 05/28 – 06/02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전시 도록을 준비하며

표지의 그림은 미국의 현대건축가인 Richard Meier가 달라스에 지은 한 부호의 미술관 겸 저택 정원에 있는 큰 나무를 그린 것이다. Meier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 나무를 염두에 두고 부지선정과 설계를 진행 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수종도 나이도 모르지만 이 나무는 수십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꺾인 가지하나 없이 편안하게 지내온 듯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빽빽하게 밀생한 잎들은 한 여름 왕성하게 잘 자라 지금 그 전성기를 한껏 뽐내는 듯 하다. 가장 쾌적한 습도와 대지의 온도를 만끽하며 여름의 은총을 구가해온 저 나무, 그러나 이제 바람이 바뀌고 가을이 깊어지게 되면 잎을 모두 떨구고 겸손히 계절에 순종해야 할 저 나무의 모습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주님, 지난여름은 참으로 무성하고 성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해시계 위로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로는 바람을 풀어놓아 달리게 하소서.

 남녘의 따가운 햇볕을 이틀만 더 허락하셔서 과일들이 마저 영글도록 하시고, 묵직하게 익어가는 포   도 송이에 당신의 권능으로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게 하소서.“  

무성하던 여름을 지나 가을에 순응해야 되는 나무의 일 년은 마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행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 순을 틔우며 봄을 맞이하고, 성대하게 잎으로 치장하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위세를 부리다 아차, 찬바람이 불면 푸르던 그 많은 잎들은 갈색으로 변하고 머잖아 죄다 땅위로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기는 그 모습이, 태어나 젊음을 한 때 누리며 한없이 승승장구할 것 같지만 종국에는 누구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는 우리네 인생을 떠올리게 하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여름은 분명히 지났고 가을도 깊은 가을 즈음에 서있는 나 자신은, 그래서 지난 내 인생 속에 치열했던 절정의 시간이 과연 있기나 했었는지, 또 포도의 단맛을 극대화하고 숙성시키려는 인생 마지막 노력을 지금 나는 기울이고 있기는 하는지 자책하는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내가 교만하여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아마 내게도 나름 왕성하던 시절이 있었을 테고, 꼿꼿하게 들고 있는 머리를 조금만 숙이고 보면 빈약하게나마 열린 작은 내 열매, 마지막 잎이 떨어지기 전까지 내가 숙성시켜야 할 열매가 분명 있는데 그걸 못보고 지냈는가 싶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어디까지 열려 있을지, 그 길이 끝날 때까지 나는 내가 가꾸어야 할 열매를 제대로 영글게 할 수는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머리를 숙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무를 두 번 그렸다. 2018년 100호 캔버스에 세워서 한 번 그리고, 2024년 같은 나무를 100호에 뉘여서 그렸다. 그래서 이번 나무는 좀 더 크고 화면에 꽉 차게 보인다. 무얼 애써서 이 큰 걸 두 번씩 그리나 싶기도 한데, 아무래도 이 나무가  주는 이미지에 내가 좀 홀린 듯 하다.

부족하나마 이십여 년 손 놓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허락하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왕 이 길을 걷게 하셨는데 내게 좀 더 영감도 주시고 재능을 내리셔서 미술사에 남는 거장들 같은 작품을 남길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텐데, 하는 가당찮은 욕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 나가다보니 그런 욕심은 잠깐 떠올랐다 스러지는 구름 같은 허상이지 정말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 그것은 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기보다 표현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리는 대상의 본질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대상이 안고 있는 분위기가 제대로 표현될 수 있으면, 그래서 그림 전체가 단순히 보이는 형상을 넘어서 어떤 심상(心象)을 전달할 수 있다면 잘 그려졌다 생각이 드는데 이런 걸 추구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현상세계 뒤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논하였듯이, 나도 그런 이데아를 추구한다고 설명하면 맞을 것 같다.

심상찮은 구름 아래 서있다기보다 누워있는 안도 다다오의 섭지코지 글라스하우스, 평범한 골목길과 한가한 농가의 뒤뜰, 악취로 유명한 모로코의 가죽염색공장 등 풍경들도 제대로 표현되었는지 자신할 수 없으나 이런 분위기에 빠져든 저의 취향으로 고른 대상들이다. 그 외에 몇 점의 인물, 그리고 정물들 역시 같은 계열의 개인적 취향의 결과물이다.

정물이면 정물, 인물이면 인물, 풍경이면 풍경 한 가지를 집중해 그리면 어떻겠느냐, 당신은 스테인리스 같은 금속류 정물을 전문으로 그리면 괜찮을 것 같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 자신은 아직 습작과정 중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은 넓고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리고 싶은 대상이 이렇게 많이 널려있는데, 어떻게 매일 쇠그릇만 그릴 수 있겠나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다.

보는 이들에게 그림 속의 내 정서가 잘 표출되고 있는지, 색깔도 남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색으로 칠해졌는지 색에 자신이 없는 나로선 늘 마음이 쓰이는데 그것도 벗어나야 할 굴레인 것 같다. 그림을 계속하다보면 그런 조바심도 벗을 날이 오겠지 하지만, 언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서 그림을 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또 지금까지 그려오던 방식에 무언가 변화를 주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지만, 이 역시 무리가 아닐까 싶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젊어서 왕성하던 나의 시간은 다 소비해버렸고 색다르고 멋진 딴 길, 더 호소력 있고 눈길을 끌 수 있는 다른 세계를 찾아보기에는 이미 늦기도 하려니와 재능도 부족 하구나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간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내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한, 릴케의 시처럼 마지막 열매가 영글도록, 포도의 단맛을 한 방울이라도 더 내 남은 인생에, 그리고 내 그림에 스미도록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 그것만큼은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나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형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