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숙 개인전 김명숙 개인전
김명숙
2021 10/06 – 10/11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노트
길을 걸으며 눈에 띄는 이름 모를 풀들, 무심코 뒹구는 옹기종기 돌들이 참 정겹다 .봄, 오월이 참 좋다. 겨우내 차갑고 쌀쌀 살을 에는 바람과 대지는 꽁꽁 얼어서 젖은 회색도시. 다시는 나무들이 싹을 틔우지 않을 까 발걸음 총총 집을 향한다. 개나리, 벚꽃 등 밥풀 같은 꽃 몽우리, 푸름, 풀냄새, 평온한 신록에 마음이 녹는다. 푸르른 희망을 표현하고 싶다. 잎사귀 하나하나 그릴 때 좀 더 색감의 깊이를 주려고 색을 또 칠한다. 돌의 오돌오돌 입체감 표현은 질감을 살리려 붓질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세상사 잡다한 생각이 다 녹아난다. 무심코 걷는 산책길, 우리 주변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돌들이 참 많다. 단단한 돌의 질감, 입체감, 오돌오돌 비바람에 단단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돌들도 세월의 흔적을 남긴다. 비바람에 조금씩 닳고 제 나름 입체감 모양의 변화를 준다. 길가 얼기설기 낡은 도로변 돌들이 비구상, 구상으로 눈에 들어온다. 돌 사이 바위틈 흙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곳에서 매서운 비바람 잘 견디며 고고하게, 싱싱, 아담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 약해보이지만 잘 견뎌낸 돌과 돌 사이 솟아나는 푸른 생명력에 경이롭고 숙연해진다
오월-비라도 오는 날, 청초한 풀냄새, 푸른 잎 돌 사이에 잘 어울리는 구도를 표현한다. 풀잎 하나하나 앙증맞고 정겹다. 어릴 때 친구들과 온 정신이 빠져 소꿉놀이 친구들 추억에 미소가 절로난다.
스케치하러 신록이 좋아 산과 들로 참 많이 다녔다. 그때 그 친구들도 문득 보고 싶어진다. 풀잎 하나하나 이름도 참 재미있다. 돌담 위 무리지은 무성한 풀들- 단단한 거친돌 위에 연약하고 앙증맞지만 단단한 돌들은 바람을 막아주며 돌과 잎들이 잘 어울리고 있다.
자연이 참 좋다.-때로는 도시의 지치고 힘들때도 있지만 길을 걸으며 무심코 이름 모를 풀들, 돌들 사이에 생명력 보이려 여린 꿋꿋이 잘 자라 싱싱한 풀들을 볼 때 나는 힘을 느낀다. 어쩌면 그 추운데 다 이겨내고 잘 자라 또 강한 생명력에 감사와 힘을 받는다.
봄, 오월이 나는 참 좋다.
길을 걸으며 풀들, 신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옹기종기 뒹구는 돌들, 오월의 싱그러운 푸르름, 풀내음, 산으로 들로 평온한 신록이 참 좋다.
소박한 자연의 한 모습을 발견하고 한겹 한겹 느리고 지루하다싶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한다. 돌의 오돌오돌 입체감의 표현은 질감을 살리려 붓질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세상사 잡다한 생각이 다 녹아난다. 정감 있고 감동 있는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시간 그린 그림에 때로는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열정으로 그림을 그릴 때 작업이 참 즐겁다. 꾸준히 작업하며 감동받는 작품이 언젠가 되겠지 갈망하며 작업할 때 신명이 난다. 좀 더 좋은 작품을 위해 오늘도 그린다.
자연에 대한 관조와 삶의 여유를 위한 산책길
김 광 명 (숭실대 교수, 예술철학)
우리는 길을 걸으며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길을 가늠해본다. 속도와 경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오늘날, 불확실하고 위험한 후기산업사회에서 이러한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런 속도감이나 경쟁의식 없이 휴식을 취하면서 천천히 위와 아래, 좌우를 음미하며 산책하고자 소망한다. 산책이라 하여 우리는 흔히들 무심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요즈음 둘레길이나 올레길, 숲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며, 삶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에 이미 들어와 있다. 삶의 반영에 대한 궤적으로서의 예술이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반성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평자는 김명숙 작가가 산책하는 중에 만나게 된 돌과 풀, 꽃, 나무 등에 대한 미적 사색을 “순례여정(巡禮旅程)으로서의 산책길”에서 밝힌 바 있거니와, 이번 가나아트 스페이스의 5월 전시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평자는 앞서의 글을 좀 더 천착하고 보완하여 그 깊이와 의미를 더하고자 한다.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자연 사물에 대한 미적 상상력이 작가의 예술의지와 결합되어 작품으로 형상화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미술사학자에 따라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예술의지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형식이 작품을 좌우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지만,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의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작품이란 미적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긴 하나, 시대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공감을 자아낼 때 반성적 표현이 되며, 이에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 작가 김명숙의 미적 사유과정을 따라가 보면, 그의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마주하게 된다. 1999년 이래 지금까지 22회에 걸친 개인전이나 2008년 이후 한국과 대만, 일본, 캐나다, 미국의 뉴욕, 스위스 바젤과의 교류전을 통해 지속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한전아트센터 갤러리(2012년 10월5일-10월 11일) 및 가나아트 스페이스 개인전(2014년 5월14-5월 19일)에서 선보인 일관된 주제는 <5월-산책길>, <5월의 산책>이었다. 여기에서 평론가 박영택은 “식물과 돌이 공존하는 풍경”을 읽으면서, 작가는 “부드러운 식물의 잎사귀와 단단한 돌의 피부를 함께 그려나간다”고 지적했다. 김명숙은 이처럼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강열한 대비 외에 유기적 생물과 무기적 무생물의 적절한 관계설정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왔다. 작품들의 타이틀인 <흔적-꽃담>, <산책길-가을서정>, <5월-산책길>, <푸른 하늘-산책길>, <산책길-흔적>, <따스한 햇살-산책길>, <산성-나의 반석>, <고기잡이 배-깊은 바다>, <휴식> 등을 보면, 주제 간에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는 있으나,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산책길, 그 길 위에서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삶의 흔적들과 여러 소재들-나무, 꽃, 새, 하늘, 바다, 구름, 햇살, 성곽, 해변가의 돌무덤과 멀리 떠있는 고기잡이배 등-과의 대화에 동참하게 된다. 산책은 역사적으로 철학의 유파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부르는 바, 산책길(페리파토스)에서 산책하면서(페리파테인) 학도들과 더불어 논의하고 강의한 연유에서 비롯된다. 또한 존재론의 예술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그의 ‘숲길’에서 진리를 향한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우리는 한 사상가의 고뇌와 숙고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이 뿌리 내리고 있는 대지(大地)의 말 걸어옴을 통해 존재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 근원을 찾고자 했듯이, 김명숙은 일상의 산책길을 통해 만난 여러 소재들에서 인간실존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인간 삶의 본래적인 의미를 묻는다.
왜 이 시대에 산책길인가? 작가에게 있어 산책길은 사색에의 길이자 예술에의 길이요, 치유에의 길이다. 어떤 이는 김명숙의 산책길을 시공(時空)의 삶을 긍정하며 행복의 파랑새를 찾는 여정으로 보기도 하고 나아가 일상의 잔잔한 서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신실한 작가에게 산책길은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순례여정(巡禮旅程)일 수 있으며, 산책을 통한 영적 성장을 도모한 은유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작가가 제시한 산책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봄으로써 장자(莊子) 미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소요유(逍遙遊)’를 접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속적 욕망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도(道)를 체득하고 도(道)를 듣는 노님(遊)의 경지이다.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사물의 기준으로 사물을 살피게 되며(以物觀物), 이 때 마음은 사물과 함께 노닐게 된다(心與物遊). 오늘날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되고 물신화(物神化)된 현실에서 잠시라도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란 지친 우리 심신의 치유를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치유는 마음의 평온과 안정에서 온다. 특히 산보하면서 조우하게 된 평범한 돌을 비롯한 자연사물의 물성(物性)에 김명숙이 부여한 독특한 색감과 질감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작가는 “돌 표면의 오돌오돌한 입체감을 표현하고 그 질감을 살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붓질을 하며 세상사 번잡한 생각을 다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이러한 작업은 영적 수련 혹은 수행의 과정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는 산책길에 마주하는 풀 한 포기, 잎새 하나 하나에서도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다양한 자연현상의 발견에서 고유한 표현을 얻게 된다. 표현성으로 넘쳐난 자연현상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들판의 꽃향기는 꽃 하나하나의 향기를 능가하며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주변풍경과 사물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감성과 관찰력이 우리로 하여금 감춰진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무릇 사물이란 존재로부터 생성되고, 이어서 생성과 변화 및 운동을 거쳐 다시 근원존재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사물과의 깊은 만남에서 사물다움인 사물성(事物性)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사물성에 미적 의미와 표현을 담아 작품성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생성에 이르는 과정에 김명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때때로 이 과정은 긴장과 갈등, 모순으로 충만해 있기도 하다. 씨앗이 발아하여 발육의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어가면서 야기되는 이러한 긴장과 갈등, 모순이 지양(止揚)되고 화해된다. 여기에 김명숙은 인간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신성(神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평자가 보기엔, 이것은 특정교리에 따른 종교라기보다는 대체로 예술이 지향하는 경지에서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경건함이 전해진다. 달리 말하면 관조와 명상이 생활 속의 진솔한 느낌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 종교란 고지식함이나 허례가 아닌, 내 안에 숨어 있는 성스러움과 숭고함이다. 김명숙의 경우엔 여기에 작가 자신의 독실한 기독교적 신앙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유한자인 인간은 무한자인 신에 의탁하여 구원받길 원한다. 작가는 작업에 임하여 신성에 더 가까이 하기 위해 겸허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인다.
김명숙은 작업하는 중에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어떤 특정 소재만을 고집하거나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주 소박하게 작업한 결과물이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자연에 대한 온전한 표현이 처음부터 불가능함을 잘 인지하고 겸손해 한다. 자연의 사물에 깃든 신성을 보며, 여기에 감동하고 이를 정성껏 어루만져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결과물로서, 돌이나 풀에 대한 작가나름의 미적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그에 있어 돌은 신성에 이르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나아가 자연물로서의 물리적인 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이 들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돌이다. 온갖 세월의 흔적을 견뎌내고 있는 돌, 그리고 그 돌 사이사이에 흙이라곤 조금도 없는 곳에서 불가사의하게 피어난 푸른 생명력에 대한 경이로움에 바친 헌사와 숙연함의 표현이 곧 그의 예술세계의 중심축을 이룬 것이다. 어떤 것을 어떻게 다루든 소재에 관한 한, 그것을 대하는 김명숙 작가의 진지한 태도와 정성을 토대로 우리는 앞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확장된 소재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말하듯,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낯설다. 이 낯섦의 극복은 자기성찰로써만 가능하다. 또한 유한자인 인간존재는 진정한 현재에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미래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본질적인 창조물은 그의 삶과 자연환경에 근거를 둔 그의 예술작품이다. 김명숙 작가는 적잖은 연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미래를 향한 호흡을 길게 하며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평자의 생각엔, 역동적인 변화를 최소한 수용하되 원래의 주제의식을 심화하며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 작가의 고유한 브랜드 가치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위한, 좀 더 원숙한 경지의 터득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자신에 고유한 소재해석 및 표현영역의 확대를 근거로 자신만의 특유한 양식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서 지나치게 기발한 것에 매달리거나 무의미하고 공허한 실험의 순환에 빠져있는 경향이 있으나, 이 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신의 것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의 개별양식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공유할 양식인, 이른바 시대가 지향하는 시대양식을 담아내며, 나아가 글로벌 시대에 맞는 세계양식과 일정부분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울러 고유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예술의 종언시대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지평을 얻음과 동시에 미술사적 의의도 아울러 담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