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태 개인전 Kang, Ki Tae

강기태
2018 10/03 – 10/08
3 전시장 (3F)

<이미지추상-우상>연작이 의미하는 것

현재 나의 작업 제목은 <이미지 추상 – 우상>연작으로 이루어진다. 1990년을 시작점으로 <종의 기원> <기호놀음> <생태도감> <고대물(物)과 종> <신화-상징> <석화> 등으로 변화되어 온 20년 동안의 추상작품들은 2011년을 기점으로 구상이미지를 추적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면 추상작가가 구상작가로 변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추상적 이미지의 모양은 그대로 살아있다. 이전에는 그 자체가 추상의 흔적을 통한 모호한 종과 개체들의 나열이었다면 현재는 그 추상 이미지들이 컴퓨터 도상(圖像)의 픽셀(pixel)처럼 모여 구상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작업진행과정은 아래와 같다.

첫째,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선택한다. 그 대상은 우상(偶像 icon)적 존재로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위치한 고양이과 동물(호랑이, 사자, 표범)들을 주된 소재로 등장시키며 또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인물, 불교적 상징물인 불상 등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가가기 어려운 이들의 위엄을 드러내어 신화적으로 승화된 우상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각 수컷이 갖는 야생적 경쟁세계와 우월적 용기, 현대사회에서 성공에 대한 야망과 의지, 명상과 자비를 상징하는 동양적 세계관 등을 담고 있다.
둘째, 선택한 대상을 소재로 하여 화면을 분할하고 스케치한다. 화면 분할은 마블링기법을 통해 얻은 우연의 비정형 이미지들을 끼워 맞추기 위한 사전작업이다. 비정형 이미지인 종이 조각들은 계획된 틀에 퍼즐 맞추듯이 배열되어 붙여지고 미진한 부분은 가필을 통해 더 확연하게 드러내어준다. 여기서 돌출효과를 높이기 위해 압축 스티로폼으로 덧씌워 붙여나갈 수 도 있다. 화면 분할을 통한 이미지의 추적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한 장치이다. 이미지를 확대(여기서 확대의 의미는 ‘본질 찾기’로 해석할 수 있음)하여 살펴보면 망점이나 픽셀로 구성됨을 알 수 있고 이미지는 바로 그 모호한 망점과 픽셀들이 쌓여 구상적 덩어리로 나타난다. 즉, 전체 이미지는 구상이나 그 시발점은 작은 추상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우리들에게 익숙한 구상과 익숙하지 않은 추상의 비교에서 외형과 본질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이를 통해 시각적으로 고정되고 습관화된 이미지의 허상을 꼬집기 위함이다. 내 작품들의 명칭이 <이미지추상>으로 이름 붙여지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셋째, 틀에 맞게 붙여진 마블링 이미지는 연상되는 형태 중심으로 가필을 통해 새로운 상상 속 숨은 그림으로 변화되어진다. 이는 어릴 적 흥미 있어 했던 ‘숨은그림찾기’나 담벼락 흔적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이용한 낙서하기 등의 유희적 놀이와 관련한다. 이렇게 꿈과 상상을 통해 표현된 초현실적 이미지들은 화면 군데군데 나타나며 실제 보이는 전체 이미지와 연관성을 갖지만 전혀 상반된 이미지로도 존재한다. 화면 전체에 분포되는 이미지들은 ‘이미지 범람’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의 디지털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요즘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들을 컴퓨터 포털 사이트 상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고, 또 ‘페북’이나 ‘인스타’를 통해 직접 만든 이미지들을 쉽게 공개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미지 속에 파묻혀 소수의 특정 이미지 클릭으로 새로운 다수의 불특정 이미지들을 꼬리 물기 식으로 찾아가는 SNS세상을 ‘이미지 속 숨어있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넷째, 결로 이루어진 이미지 간 합성을 통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뤄 나간다. 마블링 이미지로 꾸며진 밑바탕위에 한 줄 한 줄 결을 그리며 연상되는 상상 속 이미지들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다시 전체 이미지 틀 속에 맞추어 나간다. 표현 방법으로 결을 사용하는 이유는 나무결, 물결, 살결, 머릿결 등과 같이 결을 모든 조직 구성의 최소단위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된 전체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작품이 되기도 하고 다른 추상작업과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의 작품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는 마치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결국은 조화와 화합 속에 전체의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다섯째, 화면 전체 이미지에 맞추어 조형적인 띠와 문양을 붙여 나간다. 여기서 붙여진 띠와 문양들, 그리고 표면에 발라지는 투명 알갱이 미디엄들은 살아있는 생물로서의 모습보다는 표본화되고 화석화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는 신화적 개념으로서 시간의 영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의미로 작용하며 우상이 갖는 영원성과 신화적 가치를 더 극대화하는데 활용된다.

2010년까지 ‘흔적’으로 지칭되며 ‘고대유물과 종’을 떠올리게 했던 추상이미지는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던져주었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난해하여 현학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런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감상자와의 소통부분에 있어 너무 유리된 것은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지금의 작품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이미지추상-우상>연작은 겉으로 보여지는 형태와 그 안에 담겨져 숨어있는 본질을 통해 신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가치인 삶의 의욕과 적극성, 성공을 대한 노력과 용기, 미래의 기대와 희망 등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마치 심리적 안정감을 갖기 위해 마련하는 ‘생존부적’의 개념과도 같다. 과연 이 부분이 얼마큼 감상자와 느낌의 공유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이미지 추상-우상>에 관한 미래적 여운

화가 강기태의 작품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뽑아내면 이런 것들이다. <신화>, <화석>, <우상>, <추상과 구상>, 그리고 <시간개념>….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으로서, 서양미술사의 정통 주제와 맥을 같이 한다.

신화는 인간이 신과 함께 살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인류가 비로소 정착생활을 시작한 뒤, 자연을 다스릴 권한을 주신 신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그럼으로써 절대적 미지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아가, 자신들의 능력을 신에 비유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신화는 인간의 본질과 내면을 비추는, 신의 이름으로 된 거울이며 상징이다.
화석은 과거의 파편이다. 시간 간격을 초월하여 과거의 존재에 닿는 마법에 다름 아니다. 노르망디에서 찾아낸 화석들이 1억 년 전의 시간에서 깨어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잡을 수 없지만 끊어진 적이 없는 시간. 그 존재를 화석만큼 단단하게 증명해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화석화를 통해 시간개념을 느끼고 기억하고 상상할 수 있다.
추상은 형태를 숨긴 개념이다. 구상은 시각에 잡힌 감각이다. 이 형식은 현대미술의 기준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됐다. 추상은 인간 의식의 진화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이며, 현대사회를 반영하는 의식의 메아리로 울린다. 구상은 미에 대한 본연적 재현이며, 미술표현의 가장 전통적 방식이다. 이 두 갈래는 대립이 아닌, 상호 공존의 관계를 지닌 채 순환한다. 인류 여명기 문화에서도 구상의 손바닥 자국과 추상적 기하학 무늬가 뒤섞여 나타난다. 보는 시각적 감각인 구상과 생각하는 의식적 능력인 추상의 반복은 동시대 미술에까지 지속된다. 기본과 변형으로 점철된 다양한 예술적 표현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시간은 보이지 않고 시간개념은 직접 보여줄 수 없다. 시계는 숫자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흔적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또한, 현재에 빈틈없이 붙어 있으면서도 경계의 막이 없는 연속체의 무한 진행이다. 이런 무형의 시간개념을 일정한 형태로 드러내는 회화적 시도는 미술사의 멈추지 않는 화두이다.

화가 강기태는 미술의 다양한 본질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신화를 통해 상징을, 화석을 통해 시간을, 추상-구상을 통해 표현방식을, 그리고 시간개념에 이르러서는 현재를 미래의 화석화로 변형시킨다. 아주 흥미로운 발상이며 개성적인 시도이다. 강기태의 작업에서 면면히 지속되는 내용이 있다. 십자 나사머리나 나뭇결 판지 같은 무늬들이다. 화석화와 시간의 영속성을 강조하려는 화가의 의도라고 밝혔다. 2010년 <석화> 연작부터 그런 부수적 장치가 옅어지면서 중심주제가 매력적으로 돋보였다. 시에나 성당 바닥의 대리석 모자이크와 유사한 오브제 문양들도 시간의 마모에 의해 강기태의 화면에서 차츰 사라졌다. 다채로움의 맹점이 줄어들었다. 한 예술가의 작업과정은 깊어질수록 단순화로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최근 작업에서도 부차적 요소를 걷어내고 근본에 몰입하는 긍정적 진행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상적 이미지 그림이 주를 이룬다. 우상은 실체라기보다 무너지고 사라질 수 있는 인위적 허상이다. 강한 이미지로 각인된 대상을 선택했을 때, 우상의 신비감과 모호성은 오히려 묽어진다. 맹금류, 유명인사, 불상처럼 자체적 이미지가 뚜렷해 화가가 의도한 우상의 의미를 잠식해버릴까 우려된다. 감상자의 선입견이 화폭의 전체적 의미를 흡수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우상은 전통적이거나 선명한 의미 대신 혼돈의 추상적 형태일 것이다. 예술은 포도주처럼, 직선적 표현과 주관적 의도가 발효 숙성되었을 때 깊은 향과 맛이 우러난다. 강기태의 <이미지 추상>은 구상적 소재를 합성해 추상적 형태로 만든 아르침볼도(Arcimboldo)의 반대 작업이다. 그의 연작은 추상과 구상, 본질과 외형을 아우르고 동시대적 현상과 입체적 효과를 다루고 있다. 다만, 전체적 구상 이미지가 압도적이라 화가의 그런 섬세한 의도들이 소소한 재미에 그칠 수 있다. 신화와 우상은 상징이다. 상징은 눈에 드러나는 표면이 아니라 기저에 응축된 의미이다. 손바닥 뒤집듯, 본말을 엎어뜨리면 무척 매력적인 작업이 새로이 생동할 것이다.

강기태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결’이 드러난다. 다양한 판자로 기막힌 입체 다면체를 만든 16세기 프라 지오반니(Fra Giovanni)의 쪽매상감 기법을 연상시킨다. 데칼코마니적인 결의 경이로운 번짐은 결국 우상의 이미지로 굳어진다. 강기태의 가장 자신 있는 영역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는 능력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의미다. 만약 화가가 자신의 타고난 묘사 재능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강기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 안광을 뿜으며 뛰쳐나올 것 같은 호랑이의 생생한 형태가 화면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의 그림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정녕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멋진 형태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어떤 놀라운 것이 자리 잡을 것이다. 강기태가 20년 동안 추구한 작업보다 더 강하고 오묘한 것이 그 빈자리에 차곡차곡 채워질 것이다. 화가에게 어려운 결단은 화폭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아끼는 단편을 포기함으로써 전체적 조화를 찾는 묘한 이치가 따른다. 화가의 뛰어난 손재주를 스스로 묻어버릴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차원의 작품세계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고, 초월하기 위해서는 기존을 허물어야 한다. 화가는 이고 지고 안고 왔던 자신의 작품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동안의 소신도 지워버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뒤에 자신의 바탕에서 뚫고 나오는 진정한 울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의식이 자신에 국한되지 않을 때 그의 작품은 비로소 거듭난다. 예술에서 삶까지 두루 배어 나오는 정신과 기운으로 다시 세워 나가는 것이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열렬하게.

화가 강기태는 날카로운 기교와 복합적 주제의식을 지녔다. 눈부시게 빛날 원석이 든든하게 자리 잡은 예술가이다. 다듬는 결에 따라 뿜어 나오는 빛은 달라질 것이다. 채우기 위해 먼저 비워낸다면 강기태의 캔버스는 더욱 그윽하게 그득하리라 믿는다.
                                                                                                               예술작가 박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