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선 개인전 Rhizome, Reset

안은선
2020 07/29 – 08/03
2 전시장 (2F)

안은선 작가는 섬유예술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정의한  ‘리좀'(뿌리줄기) 사상에 영감을 받아 ‘생명’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들뢰즈의 리좀 철학 중에서도 ‘다양체'(multiplicités)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식물의 뿌리를 구성하고 있는 주근(主根)과 주변 곁뿌리들의 전방위적이고 비규칙적인 관계망을 조명한다. 특히, 이 세상 모든 것은 그 어떤 상위 조직의 일부로나, 연장선상의 개체로서 기능하지 않으며, 자체적인 복잡성과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독립구조로 존재한다고 한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 사상에 착안한 다각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신작인 ‘Rhizome, Reset'(2020)에서는 소재의 특성과 선이라는 조형요소를 활용해 리좀의 형상을 이전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위계 없이 뻗어 나가는 땅 속 뿌리들의 확산 행태와 미세한 근모들의 ‘분권된 관계’를 강조한다.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한 미색의 노방 소재는 그물 같은 짜임새가 보일 정도로 성글게 직조된 직물로서, 표면에 수 놓아진 선들의 형상을 드러내는 밑바탕의 역할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땅 속 뿌리들의 상징이다. 또한, 노방이라는 소재의 반투명한 재질적 특성은 빛을 통과시키기는 효과가 있는 한편, 그 위에 새겨지고 겹쳐진 선들의 그림자도 투영하여 조도에 반응하는 시각효과까지도 담아낸다. 이로써 작품에는 또 하나의 심미적 층위뿐만 아니라, 내재적 복잡성의 의미도 더해진다. 더 나아가 작가는 이 직물을 둥글게 말고, 비틀고, 구부려서 평면인 소재를 입체화 하며, 이는 뿌리의 다차원적인 구조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생명의 꿈틀거림도 함께 제시한다. 그리고 살아있는듯 보이는 이 거대한 그물 덩어리에 자유분방하게 뻗어 나가는 연둣빛 선들을 새겨 넣어 작가가 임신 중 뱃속 태동에서 느꼈던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새싹과도 같은 기운으로 그려낸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선들의 망 속에서 생명의 끝없는 잠재력이 전달되며, 그 원초적이고 거침없는 힘과 에너지는 유기적인 조형미로 표출된다. 작가는 재료의 특성과 선형의 변주를 적극 활용하여 ‘잠재적 다양체’라는 개념을 시각화한 것이다.

질 들뢰즈는 빈틈이 보이면 그곳을 향해 깊이 파고 들어가고, 때로는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파괴하면서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땅 속 뿌리들의 확장 체계, 또는 그 어떤 체계의 부재를 인간사에 비유했다. 안은선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아이를 가졌을 당시 느꼈던 태동을 떠올리며 새삼 생명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인간이 새싹 같은 시작으로 세상에 나타나지만, 그 똑같은 생명의 힘으로 인해 갈수록 무질서하고 강탈적인 모습으로 지구상에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세포,’ ‘맥,’ ‘순환계’ 등을 떠올리는 작가의 작업 속에는 리좀의 형태가 인류와 닮았다고 한 질 들뢰즈의 철학이 상징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와 형태로 짙게 녹아들어 있는 듯하다. 또한, 작가의 작업에서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에르네스토 네토(Ernesto Neto), 치하루 시오타(Chiharu Shiota)와 같은 몇몇 현대미술가들의 이름이 떠오르는 이유도, 그들 역시 작업을 통해 지속가능성과 상생의 문제를 고민하고, 설치라는 장르로써 생물학적 형태를 고찰하며, 실이라는 매체로써 인간관계와 혈연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사유의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야 말로 갈수록 복잡한 ‘뿌리’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를 보다 근원적인 깊이로 들여다봄으로써 혼돈 없이 자연 앞에 떳떳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가장 근(根)본적인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마주하게 되는 안은선 작가의 작품들은 질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 나아가 앙리 베르그송의 질적 다양체, 더 넓게는 베른하르트 리만의 기하학적 다양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적 개념들을 암시해줌으로써 위와 같은 존재론적 사색와 고민들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글_조은정(삼성미술관 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