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복 개인전 칠(漆)흑에 새긴 빛 – 옻칠화
정광복
2020 04/01 – 04/13
2 전시장 (2F)
작가노트
칠(漆)흑에 새긴 빛 – 옻칠화
시각 예술은 예술이라는 개념의 한 부분으로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다.’의 의미를 가진 회화(繪畵)라 일컬으며 지금까지 발전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눈으로만 감상하는 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나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오감 모두를 자극하는 한편 행위, 이미지가 없는 생각마저도 예술로 귀결되어 종합예술형태로 귀속되는 시대이다. 이런 급변화 시대성에도 불구하고 옻칠화를 재료로 국한시켜 종합예술형태로 바라보지 않고 공예가들이 마치 예술가에 대한 숭고함을 갖추려 하는 욕망이라고 치부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현대미술은 결국 재료이다. 물감으로 그리거나, 돌을 깎고, 종이나 천을 붙이거나 하는 행위는 재료에 의해 변화되는 다양한 표현의 과정이며 수법이며 형식이 된다.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피카소의 황소, 뒤샹의 샘 작품은 기존의 것을 부정 파괴하는 창조 정신과 함께 재료의 한계를 무너트려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해지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들 작품에서는 기존의 재료를 간략 수정하는 과정을 포함하지만 현대미술품은 간략 수정에 머무르지 않고 매우 정교한 규칙, 계산과 함께 기술(육체)등의 장인 수식어를 포함시킨다. 미술을 단지 이미지로만 생각하게 되면 미술의 반을 잃는 것이다. 재료의 선택, 활용 방법과 수준에 의해 현대미술의 흐름이라는 결과가 만들어 지는데 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 미술가들이다. 옻칠화를 공예의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장인 수식어를 포함하는 평면 회화로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옻칠화는 예(藝) 와 기(技)를 겸해야 한다. 예(藝)는 조형적 능력을 의미하고 기(技)는 장인의 수식어를 포함하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예와 기는 창작에 있어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일정한 수준 이상에 도달한 기는 예를 결정하는 한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와 기는 내용, 형식과 같이 옻칠화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항목이다. 옻칠화는 수 많은 옻칠 장인, 예술가들에 의해 매우 정교한 기(技)를 발전시켜왔다. 이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성한 예술인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藝), 기(技) 두 항목을 기반으로 한 창작 연구를 통해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정립하였다. 조합과 변형은 재료의 조합, 기법의 조합, 기법 재료의 조합, 기법의 변형을 의미한다. 창작에 있어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는데 조합과 변형이 효과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이질감의 생성으로 화면 전체의 통일감과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도출한다. 효과적인 수반이라 함은 조합 변형이라는 조형 능력의 숙련 정도를 의미한다. 또한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통해 계승, 발전, 창신(創新)이라는 창조 정신을 정립하였다. 이는 서양의 창조 정신과는 다른 창조 정신으로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이 두 사자성어로 쉽게 풀이될 수 있다. 옛것을 부정, 파괴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서양식의 이분법적인 창조 정신과는 대립 되는 이념으로 조합, 변형, 개발이라는 조형 원리를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긍정, 구축 정신을 예술관으로 삼고 있다. 서양식의 이분법적인 창조 정신을 반증하기 위해 상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인 조형 요소로 하나의 자유로운 화면을 만든다. 직선과 곡선, 사각형과 원형의 간단한 요소 외에도 상반, 대립되는 개념의 요소들을 사용하였다. 나무를 부착하고 그 위에 옻칠하여 실제 문, 창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마치 실제 오브제 안에 그림이 담겨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실존과 허구의 상반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구상과 추상, 정형화된 도형의 형상과 비정형의 형상, 단순화된 블라인드 형상과 창문 형상 역시 안과 밖, 개방과 폐쇄라는 상반, 대립 되는 의미의 구성요소로 사용하여 새롭고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전통 창살 문 형상이 작품에 나타나기 전에는 크고 작은 소통의 창을 의미하는 사각 프레임이 등장하였다. 이는 전통 창살 문의 연속이다. 예술적 가치의 내용을 크고 작은 창을 통해 창 밖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외침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창을 통해 들려오는 작가의 외침에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을 활짝 열어 진정한 옻칠화 예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각 프레임과 전통 창살 문은 소통의 창구라는 의미 외에도 작가 개인에게 있어 소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팔레트를 의미한다.
‘칠흑과 같은 어둠’ 에서 칠흑은 흑칠(黑漆 – 검은색 옻칠)에서 유래되었다. 흑칠은 그 어떤 흑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한 줄기의 빛도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가려진 캔버스에 빛을 비춰 세상을 밝히는 옻칠화를 ‘칠(漆)흑에 새긴 빛’ 이라 한다.
옻칠화(漆畵)를 개척해 가는 실험적 표현
오 세 권 (미술평론가)
‘칠’(漆)은 대개 옻칠이라 하며 용기에 칠을 기반으로 하여 문양을 나타내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칠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번영과 쇠락을 반복하며 독특한 표현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와 같은 칠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면서 독자적으로 형성한 예술이며 선조들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근래에 들어 현대적인 옻칠화가 등장하였으며 칠화가들은 칠의 수많은 전통 기법들을 이용하고 융합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서 ‘옻칠화’에 대한 이해는 그림의 개념보다 공예라는 인식이 강하다. 옻칠을 재료로 하여 다양한 색채와 재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용기 위에 자개를 붙이고 옻칠하는 방법으로 인식되어 있다. 1970~80년대 까지만 하여도 자개와 옻칠을 이용한 나전칠기 혼수품이 많았으며 우리 생활에서도 친숙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변화에 따라 신소재의 개발과 이에 맞는 참신한 디자인의 제품이 개발되었지만 급변하는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옻칠산업은 점차 쇠락해 갔다. 고가의 옻칠은 저렴한 화학도료 혹은 합성도료 등으로 대체되면서 옻칠산업의 단절까지 언급되었고 옻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조차 찾기가 힘든 상황에 이른다. 그러한 가운데 베트남과 중국에서는 현대적인 옻칠화 분야가 발달 된다. 옻칠이 공예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현대회화의 ‘옻칠화’로 부활되어 옻칠화 예술운동으로 확대되었으며 새로운 회화 장르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옻칠화를 창작할 수 있는 작가군과 주변적 여건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았다.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옻칠화에 대한 연구와 작품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정광복이다.
정광복은 초기에 회화를 전공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의 칭화대학교에서 옻칠화를 접하며 옻칠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옻칠화의 현대적인 표현 가능성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서는 대중들에게 옻칠화를 우리의 소중한 문화 예술임을 인식시키고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초기에는 옻칠의 성질과 특성에 대한 연구를 실험하고 점차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작품을 제작하다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면서 추상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근래 들어서는 문(門)을 연상하게 하는 사각 프레임들이 등장하고 사각형태와 함께 다양한 색상과 여백의 공간을 구성하는 작품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옻칠화의 여러 가지 기법들을 이용하면서 색.면을 나타내는 실험적인 화면을 나타내고 있다.
정광복의 작품에서는 흑칠, 주칠, 투명칠, 은박, 금박, 알루미늄 박, 무늬목, 진주 등의 재료와 주요 기법으로는 마회(磨繪)기법 등이 이용되는데 흑칠(黑漆)은 칠 고유의 검은색으로 나타난 아름다움을 발현하며 칠흑과 같은 어두움과 강렬함을 나타내고 있다. 주칠은 붉은색으로 선명하고 강렬하게 나타나는데 시선을 집중시키게 한다. 투명칠은 화려하면서도 은은하고 중후함을 가지면서 투명칠 고유의 색상과 영롱함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개의 색은 흑칠과 주칠의 안정적 조화를 도와주면서 화려한 색채를 나타낸다. 작품들은 중후하면서도 화려하고, 은은하면서 영롱한 색채로 표현되어 있는데 장식적이고 화려하여 시선을 집중시킨다. 부분적으로는 원목을 매우 얇게 가공한 무늬목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수공으로 표현된 목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으며 기하학적인 점이나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하여 주변 화면과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칠하고 갈아내는 반복 과정에 의해 생성되는 채도, 명도 외에 투명도라는 조형적 요소가 더해졌다. 이는 기존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빛으로 명암을 만들어내는 옻칠화 고유의 조형미이다. 정광복의 작품에서는 투명도에 의해 옻칠화 고유의 화려함과 은은함이 조화되어 시선을 압도한다.
작품에는 사각 프레임들이 등장하는데 블라인드와 창을 의미하고 있다. 단순화된 블라인드 형태에는 다양한 효과를 주고 있으며 창은 사각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창의 형상은 화면 속에서 크고 작은 사각의 형태로 여러 개 나타나며 규칙성과 반복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추상화처럼 보인다. 화면에서는 블라인드와 사각형의 창 그리고 색채의 조화가 화면 전체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가 자주 보아왔던 유화나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과는 다른 표현의 신비로움을 볼 수 있다. 이는 옻칠의 재료와 표현방법으로 이루어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옻칠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면 화면에 나타나는 재료의 표현과 기법이 조화되어 나타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옻칠의 여러 가지 기법을 습득하고 융합하여 표현대상에 맞게 응용하여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림과 재료의 표현이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박, 은박, 계란껍질, 인공펄, 자개, 식물, … 등 다양한 재료들을 옻칠화라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디자인하여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단기간 내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오랜 시간의 실험이 필요하다. 정광복의 작품세계는 국내에서 옻칠화를 개척해 나가는 실험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큰 결실을 맺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