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정 개인전 사물과 꿈_ 책은 색깔이다.
김천정
2019 09/18 – 09/23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작가약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박사 / 개인전 23회(일본, 중국, 홍콩, 서울 등) / 초대 및 그룹전 400여회 /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각종 미술심사위원 40여회 / 서울시미술심의위원 등 각종위원 30여회 / 연구논문 20여 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강사 역임
현) 삼육대학교 Art & Degign학과 교수 cjkim@syu.ac.kr
작가노트
『저기 걸어간다/ 훗날 한 권의 책이 될 사람/ 하여 책은 목숨이다
다양한 빛깔의 놀이터/ 반응의 화학 공장/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사유의 비탈과도 같다 』
때로는 상대방의 울음도 경청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책의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요, 인간의 이해는 세계에 대한 이해이고 끝내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책은 문자와 이미지가 편집된 물리적 형체이기도 하지만 고도화된 정신의 산물이다. 때문에 장식이 아닌 양식이라 부른다. 세상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념이나 이동하는 사유도 책으로부터 기인한다. 존재 이유나 차원의 문제, 견해이거나 걸음을 옮기는 방향까지도 모두 책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물론 읽다가 던져버린 책도 구석에 쌓여있다. 다양한 책은 다양한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우리가 맨눈으로 구별하는 빛깔만도 일만 칠천 가지가 넘는다. 인간의 빛깔은 이보다 다양하다. 늘 경험하는 좌절과 한숨, 기쁨과 눈물, 꿈과 행복은 각기 다른 빛깔로 변주된 책의 목소리이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빛깔은 대부분 삼키고 소화하지 못한 빛깔만을 내뱉고 있다. 그렇게 드러난 빛깔은 아픔이고 고통(괴테)이다. 타인의 빛깔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이다. 책은 죽음처럼 살고 삶처럼 죽게도 한다. 누구나 따뜻하고 자유롭고 감동적인 한 권의 책이 되길 희망하는 이유이다. 책은 온도를 차단하는 절연체가 아니다. 액화되거나 비등하여 무언가로 전이되는 화학원소이다. 물체와 물체를 서로 비벼 열을 만들 듯이 책과 사람은 마찰할수록 뜨거운 유대와 반응을 일으킨다. 반응의 크기가 곧 삶의 크기다. 책을 덮는 순간 무지한 사람으로 전락하거나 비로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작품 평론
‘책’은 ‘색깔’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렇다면 책은 모두 ‘전자책’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다. 그렇지 않다. 정보의 디지털화가 대세이며, 아날로그적 책은 이제 사라질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비데가 나온다고 휴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데 때문에 휴지는 더욱 고급지게 변한다. 싸구려 휴지는 낀다! 몹시 불편하다.
정보전달의 수단에 앞서 책의 존재는 ‘아날로그적 물질성’으로 경험된다. 인지적 경험에 앞서 감각적으로 먼저 경험된다는 이야기다. ‘침 바르기’다.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에만 침을 바른다. ‘돈’,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가장 기본적 본능인 ‘침 바르기’는 아주 어려워지고 있다. 인터넷뱅킹 때문에 이제 ‘돈’에 침 바를 일은 거의 없다. 돈은 계좌에서 계좌로 그저 이동할 뿐이다. 돈이 ‘파동’인가, 아니면 ‘입자’인가에 대한 논쟁은 이제 ‘가상화폐’ 출현으로 끝났다. 돈은 ‘파동’이 되었다. 단언컨대 침을 바를 수 있는 돈은 곧 사라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침 바를 일도 이제 거의 없다. 젊어서는 그렇게 침을 바르지 못해 안달했지만 결혼하고 몇 년 지나면 침 바를 일 거의 없어진다. 나이 들면 구강 건조증까지 온다. 이제 망한 거다.
그래서 책이 중요한 거다. 책은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침 바르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침을 바르며 책장을 넘기는 일은 심리학적으로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가능케 하는 자기성찰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래서 아날로그 책의 물질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거다.
이제까지 나는 책의 물질성과 관련해 ‘침 바르기’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김천정 작가는 책이 가진 또 다른 아날로그적 물질성을 보여준다. 모두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표현하지 못했던 차원이다. 책은 ‘색깔’이었다. 이건 ‘침 바르기’보다 한 수 위다. ‘공감각(synesthesia)’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감각을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을 ‘공감각’이라 한다. 시각, 청각, 후각과 같은 감각은 해당 물리적 자극과 1:1로만 대응한다. 소리자극(음파)에는 청각이, 가시광선에는 시각이 반응한다. 그런데 그 대응방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소리를 들으면 색깔이 떠오르고, 냄새를 맡으면 소리가 떠오르는 경우다. 극히 일부 사람들만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면 누구나 공감각적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러시아 심리학자 라자레프(P.P. Lazarev)는 음악을 들을 때 전등을 껐다 켰다 하면 음악소리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빛이 있으면 소리가 커지고, 빛이 사라지면 소리가 작아진다는 것이다. 청각이 시각적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김천정 작가의 책은 ‘정보’도 아니고 ‘침 바르기’의 원초적 경험도 아니다. 공감각적으로 전환된 ‘색깔’이다. 책장의 책들이 김 작가의 그림을 통해 갑자기 ‘색깔’이라는 공감각적 경험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그의 그림은 극히 일부의 천재들만의 영역이었던 공감각적 경험을 우리에게도 가능케 한다. 칸딘스키의 추상회화가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의 공감각적 실험을 통해 다양한 디자인 제품으로 거듭났던 것처럼, ‘색깔’로 변신한 김천정 작가의 책을 보면서 우리는 ‘다채로운’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아, 그렇다. 책은 원래 ‘침을 바를 수 있는 색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