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희 개인전 반복의 미학 : 들추기와 감추기
유중희
2019 02/27 – 03/04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들추기와 감추기
돌의 의미는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시각의 연쇄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돌의 표현은 리얼리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돌에서 체험한 환영을 통해 존재를 들추기 위함이며, 화면에 나타나는 기하도형의 어두운 면은 감추기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상상력을 청조하는 역할을 한다.
들추기와 감추기의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표현 경계에서 느끼는 미세한 떨림은 연출의 구성요소인 플롯이 주는 극적인 상황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화면의 내부는 이 떨림으로 모든 시관을 동원해서도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작가는 이 점이 좋다. 돌이 보여주는 무한한 연속성을 작은 블랙홀 같은 어둠 속으로 넣어서 경험하지 못한 시공간으로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Disclosure and Concealment
The meaning of rock is determined by the consecutive interactions between the object and the view from which one sees it. The rock is expressed not as a way to show its reality, but in order to expose its existence through the vision that the artist experienced with the rock. The dark side of geometrical figure presented in the screen is placed, playing a role in creating imagination from the mind through work of concealing.
The slight trembling being felt in the boundary, where the two opposite things – disclosure and concealment – are represented, might not know the dramatic situation given by the plot, an element of directing. This tremor makes it hard to measure the inner side of black screen even with all possible sights. The artist is fond of this because the infinite continuity represented by the rock leads to unexplored space and time by being put into darkness like a small black hole.
이질적 촉발, 또는 시간과 공간의 탄생
-유중희의 근작들
2014년에 입체와 평면의 형태로 제작한 <욕망의 순환> 연작에서 유중희는 깔때기처럼 생긴 이미지를 제시했다. 인간의 소화기(消化器)와 유사한 깔때기의 형상은 작가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또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남은 것이 없는 욕망의 덧없음”(작가노트, 2014)을 나타낸 것이다. 그 깔때기의 오므라든 형상에서 우리는 좀처럼 ‘완전한 전체’ 또는 ‘의미로 충만한 세계’를 만끽할 수 없다. 오히려 그 형상은 빠져나간 것들, 밑으로 흘러내려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그런데 “남은 것이 없는 상태”, 즉 있던 것이 빠져나가거나 흘러내려 생긴 공백을 어찌할 것인가? 일단 상상력을 동원해 그 안에 다른 뭔가를 채워 넣을 수 있다. 우리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물을 먹는 것처럼 그 오므라든 텅 빈 것에 뭔가를 집어넣어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채움, 메움은 잠정적, 한시적이다. 채워진 것들은 머지않아 빠져나가고 밑으로 흘러내려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음식물을 먹는 일이 그렇듯 깔때기를 채워 넣는 일에는 완성도 끝도 없다. 이것이 바로 유중희가 “덧없다”고 표현한 ‘욕망의 순환’일 것이다.
유중희가 말하는 ‘순환’의 의미를 좀 더 숙고해보기로 하자. 욕망의 순환은 외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내 안에 받아들여 중단 없이 자기화하는 일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음식물을 먹음으로써 나는 그것을 내가 아닌 것에서 나인 것으로 바꾼다. 기술을 매개로 대상을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만들거나 우리의 인식능력에 표상되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일종의 ‘타자의 자기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타자의 자기화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의 섭취가 몸에 탈을 일으키듯 화가가 끌어들인 외부의 이질적인 것들이 작업의 전체문맥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유중희에 따르면 “욕망의 부정적인 면”(작가노트, 2018)이 부각될 때가 있는 것이다. <욕망의 순환>(평면)에서 유중희는 나무패널 위에 납판과 동판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날카로운 철핀으로 자국을 새긴 후 그 위에 물감을 부어넣는 방식으로 깔때기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여기서 나무의 물성과 금속의 물성, 또는 날카로운 철핀 선과 유기적인 이미지는 한데 어울려 깔때기의 형상을 빚어내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전체 안에 완벽하게(무리 없이) 동화된 상태에 있지 않다.
‘타자의 자기화’가 원활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화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기동일성을 지키고 보존하려면 이런 종류의 타자를 최대한 멀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기동일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타자의 도래, 또는 타자의 침입을 차단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유중희의 <테트라포드> 연작(2014~2016)은 해안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 유중희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파도와 드센 풍랑의 두려움에 맞서 콘크리트 덩어리를 요새 삼아 해안에 테트라포드를 둘러 쳤다”(작가노트, 2016). 한동안 이 화가는 그 테트라포드 한복판에 머물며 욕구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 혹은 나에게 소유된 것으로 만드는 인간의 태도를 숙고했다. 또는 저 너머에서 나를 향해 밀려오는 타자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사유했다. “통제할 것인가 아니면 탈주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를 따라 당시 유중희는 욕구(besoin)와 욕망(désir), 또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갈림길에 서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면서 “나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대상(타자)을 나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사유”(존재론)와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혹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사유”(형이상학)를 구별했던 것이다.
유중희가 근래에 제작한 돌 연작들-<환영의 경계>, <환영의 창>, <모호한 경계> 등-은 이 화가가 특별한 방향전환을 꾀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방향전환은 “욕망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로의 전환”(작가노트, 2018)을 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화(동화)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타자와의 대면이라는 수준을 넘어 타자를 통해서 전체화된 세계의 상관자로서 주체의 의식이 구성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중희에 따르면 돌 연작은 수석의 일종인 평원석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마치 섬처럼 생긴- 기이한 돌의 형상은 과거의 문인들처럼 수석(壽石)과 괴석(怪石)을 감상할 것을 촉구한다. 주지하다시피 수석은 바라보는 이의 관점과 감정, 지향성에 따라 매 순간 달라 보인다. 남송(南宋)의 범성대(范成大, 1126-1193)가 「태호석지太湖石志」에서 묘사한 다음과 같은 구절, 곧 “파도 물결에 깎여 구멍이 뚫리고 물에 잠기거나 쓸려 매끄럽게 되고 혹은 촘촘하게 적셔져 옥처럼 되거나 곧게 깎이어 칼과 창처럼 되고, 가지런히 곧은 것이 산봉우리 같고 펼쳐진 것이 병풍 같고 미끄러운 것이 기름진듯하고 검푸른 것이 옻칠한 것 같고…”라는 구절을 음미해 봄직하다는 말이다.
물론 유중희의 근작들을 바라보는 행위는 수석 감상 그 이상이다. 그것이 사물의 잠재성의 수준에서 돌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종종 유중희의 돌 형상은 ‘눈(目)’이 있는 하나의 얼굴로 보인다. 그 얼굴은 “표정을 담고 우리를 응시하는”(작가노트, 2018) 까닭에 우리는 그 얼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그것이 ‘무서움에 질린 얼굴’로 보일 경우에 나는 어떤 무서움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내 앞에 하나의 가능세계, 곧 무서운 세계가 출현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내 앞에 출현한 타자의 얼굴을 통해 지금 나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 지금 내가 현실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부분까지 통틀어 하나의 전체로서 ‘지각장의 구조(champ perceptif)’가 발생한다. 즉 홀연히 나타난 타자를 통해 나는 잠재적인 부분들, 가능성들, 배경과 언저리들을 종합하여 지각할 수 있다. 결국 들뢰즈가 말했듯 “타자의 눈은 가능한 빛의 표현이며 타자의 귀는 가능한 소리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그 무서운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얼굴을 대면하기 이전(과거)과 이후(현재)가 분절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렇듯 타자의 출현이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분절시킴으로써 나(주체)의 내감(內感)의 형식으로서 시간이 발생한다.
유중희에 따르면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야만 그 가치를 발견해 낼 수”(작가노트, 2018) 있다. 유중희의 근작들은 타자의 출현, 또는 ‘이질적 촉발(hétéro-affection)’로 발생한 공간과 시간을 가시화한 회화로 판단할 수 있다. 돌의 일부가 녹아내려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 돌을 드러내면서 또한 감추는 시꺼먼(그리고 반짝이는) 표면들은 외부의 이질적인 것들,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매 순간 (화가 주체에게) 출현했다 사라진 공간과 시간들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중희의 근작들은 타자의 출현, 또는 이질적인 외부세계와의 만남을 다룬 특별한 회화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물론 다시금 유중희의 근작들이 결국 여전히 타자의 자기화, 곧 자신의 욕구의 실현을 위한, 주체에게 종속된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해볼 수 있다. 그의 회화는 레비나스가 존재론으로 칭했던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혹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는” 통로와 접합할 수 있을까? 그 결과를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셸 트루니에(Michel Tournier)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방드르디와 함께 살게 되면서 로빈슨의 내면에 일어난 심경의 변화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 글의 결말을 대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해 보인다.
“이제 막 발생한 엄청난 재난은 그 자신이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 방드르디는 자신도 모르게 이 대지의 뿌리를 뽑아놓고 이제 와서는 로빈슨을 저 다른 것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대지가 지배하는 그 세계에 오직 그에게 고유한 세계를 대치시켜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로빈슨은 그 세계가 어떤 것이 될지 알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새로운 로빈슨이 그의 낡은 살갗 속에서 꿈틀대면서 이 관리된 섬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한 채 무책임한 선두를 따라 낯선 길로 들어가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홍지석 (Hong Jisuk,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