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범 개인전 분리불안 : 생존의 필수 감
윤여범
2026 09/30 – 10/05
3 전시장 (3F)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는 큰 불안을 느낀다. 엄마의 자궁 안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이기 때문이다. 비명을 지르듯 울던 아기는 부모의 익숙한 품과 목소리를 통해 이내 안정을 되찾는다. 이처럼 ‘주체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불안과, ‘주체와 타자가 하나의 세계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안정감은 인간에게 매우 원초적인 감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안한 타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를 분리한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는 바로 이러한 역행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회화는 이와 같은 관념을 담아낸다. 흥미로운 것은 동양과 서양이 화면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서양 회화의 화면에 대한 관념은 알베르티(Alberti)가 제시한 ‘열린 창’의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양 회화에서 화면은 화가와 감상자가 서 있는 현실의 공간에서 바라본, 창 너머의 세계를 재현하는 장치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그림 속 세계와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세계는 서로 구분된다. 그림은 화가와 감상자가 서 있는 현실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타자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추상회화가 등장하면서 화면은 더 이상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창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된다. 특히 색면추상은 화면 자체를 숭고한 대상으로 승화시키며, 상실된 주체를 위로하는 타자 자체로 기능한다. 이는 주체와 타자, 주체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동양 회화의 화면에 대한 관념은 종병(宗炳)의 ‘와유(臥遊)’ 개념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와유는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행위가 단순한 관찰을 넘어 정신적으로 그림 속 세계를 유람하는 경험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화가와 감상자는 화면 밖에 고정된 채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화면 안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경험한다. 화면은 화가와 감상자의 정신이 만나고 교류하는 ‘만남의 광장’이 된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동양 회화는 ‘여백’을 중요한 조형 요소로 발전시켜 왔다.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화면 안과 밖, 주체와 타자, 현실과 그림의 세계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동양 회화의 화면은 주체와 타자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두 화면의 관념을 ‘배접(褙接)’이라는 행위를 통해 마주하게 하는 데서 출발한다. 배접은 단순히 두 재료를 풀로 붙이는 콜라주와는 다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일방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호하고 지탱하는 관계를 만든다. 서로 다른 두 면은 맞닿음으로써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는 새로운 공간과 관계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세계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기대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타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분리적 세계관은 주체를 보호할 수 있지만, 동시에 주체를 고립시킨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통합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이는 부족하고, 약하며, 상처투성이지만 분리로부터 오는 불안을 다스린다.
결국 ‘분리불안’은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그 분리로부터 오는 불안을 느끼며, 다시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감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감각인지도 모른다.
윤여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