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순 개인전 The Vein of My Life_결
지희순
2025 06/25 – 06/30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바라보는 사람
화가 안문수
회화는 현실 세계의 형태로부터 출발한다. 특히 미술에서 회화는 화가의 미적 감각에 의해 구성되어 제작된 구도와 소묘를 포함한, 풍부한 표현력이 깃든 평면상의 그림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화의 근본은 사물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에 기인한다. 화가는 그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보는 사람이다. 사물과 세상을 똑바로, 진실되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시지각에 포착된 사물의 이미지와 정보만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다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사유하는 것이며 세상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조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눈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것이 아닌, 심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세계에 대한 접근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흔히 눈으로 바라보고 인지되는 것이 실재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간과 환경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가볍게 지나친다. 이 세계는 쉽게 그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희순 화가의 시선은 독특하다. 그녀는 육안으로 사물의 전체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피사체의 특정 부분을 확대해서 바라본다. 늘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사물은 낯설고, 때로는 경이로운 실체로 망막 안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고 들어온다. 이제 사물들은 그녀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치열했던 생존의 시간과, 아름다웠던 생명의 비밀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녀는 긴 시간이 사물의 표면에 만들어 놓은 결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 또한 그것과 닮아있음을 고백한다
한지를 찢어 겹겹이 붙인 지희순 화가의 화면은 운동감이 가득하다. 찢기고 구겨져 수많은 결이 만들어지고, 겹겹이 쌓인 한지의 층은 시간과 생명의 치열함을 느끼게한다. 그녀에게는 그림이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자아는 세월이 만들어 낸 결로 이루어졌는데 화면 가득히 만들어진 결은 그녀의 삶의 시간이 세월 속으로 사라지거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켜켜히 쌓여 기념비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술은 자유롭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유롭고 창의적일 때 비로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그녀는 한지의 고유한 쓰임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획득하였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담고 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들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서 작가 자신의 내면과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로 나아갔다.
그녀의 작업은 자연적 감각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연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 즉 자연이 생성되고 성장하고 소멸되는 생명의 흔적으로
남겨진 시간의 결을 표현한다. 그녀는 오래된 사물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이나, 자연에 새겨진 생명의 흔적을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그녀에게 작품은 시간의 기록이며, 몸의
흔적이다. 한겹 한겹 쌓아 올린 한지의 층과 주름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꾸준한 수행이며 기도이다.
지희순 화가의 작품은 은유적이다.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다. 은유는 사물과 시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적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들의 과제다.예술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는 특별한 시간을 내재하고 있다. 사물의 미는 많은 시간이 흘러 다른
사물의 조명을 받아 회상으로 나타난다. 미는 순간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이러한 신중함으로 미는 품위를 지니게 된다.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가장 고상한 종류의 미다.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다가 문득 의식 깊은 곳에서 만나게되는 그런 아름다움, 지희순 화가의 그림이 그런 아름다움과 닮아 있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