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혜 개인전 유리: 되다

안지혜
2024 06/12 – 06/18
2 전시장 (2F)

정동의 선으로부터: 떠도는 관계, 너머의 사각형

 

안지혜의 그림은 공간과 관계의 상대성과 모호함에 대한 그림이다. 그것은 공간 감각의 표상으로서 물질적 지각과 의식적 의미라는 두 차원을 아우른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을 잇는 것은 불안과 긴장의 기억이다. 작가는 대도시 공간에 대한 경험과 여기서 비롯된 감정을 물질적 공간에 대한 지각 구조에 미묘한 표현적 요소와 감성적 차원을 덧붙여 시각화하고 있다. 그림은 견고해 보이는 선들의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으로 보이지만, 발광하는 선들의 미묘한 교차와 평면들의 밀고 당김 속에는 인식의 불확실성과 관계의 모호함이 암시되어 있다.

 

선들은 보이지 않는 대상들의 테두리를 따라 그어진 듯 어떤 경계들을 암시하며 화면을 가상의 삼차원으로 전환한다. 이 가상의 공간에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떠오른다. 이것들은 공간 속 가상적인 평면을 암시하면서 앞뒤로 혹은 위아래로 공간을 가르고 있다. 각 평면은 사선에 의해 화면에 고정되거나 다른 분할 면과 앞뒤, 위아래로 연결된다. 이는 안지혜의 그림이 언뜻 투시도나 건축도면 같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그림은 물리적 공간의 원근법적 투시이거나 세워진 투명한 면들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첩된 면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기에 삼차원 공간의 환영은 무너진다. 가까이에서 보면 눈은 평면을 가르는 선을 따라 화면 위를 이동한다. 눈은 사선에 이끌려 뒤로 혹은 앞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선은 교차점에서 그대로 진행하거나 뒷길로 빠지기도 한다. 결국 일관성 있는 완결된 공간은 없고 시각장만 있다. 번짐 효과는 선이 공간을 구분하는 기능을 넘어서 공간을 밝히도록 한다. 그어진 선은 자국이 아니라 빛이 된다. 이렇게 그림 속의 선들과 면들은 회화면에 순수한 시각 유희를 만든다.

 

그런데, 얽힌 선들과 투명하게 중첩된 면들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있다. 그것은 그어진 선들이 하나의 굳건한 형태나 일관된 공간을 결정짓지 못하고 그림 속 공간을 앞뒤로 위아래로 움직이게 하고, 이차원과 삼차원으로 변형시킨다. 사선은 그 힘의 방향을 지시하는 지표로 나타난다. 사선이 이끄는 방향에 따라 선들이 예시하는 공간은 평면에서 입체로, 입체에서 평면으로 전환한다.

 

안지혜의 그림에서 선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안지혜의 선은 기하학적인 분할의 도구를 넘어서 의미론적인 매체가 된다. 세계의 근본 구조를 암시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회화의 수평과 수직의 선과 이상적 공동체 공간을 표현하고 있는 리시츠키의 프룬 라움(proun raum)의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모티프들처럼. 몬드리안의 선이 형이상학적인 구조를 표현하고 리시츠키의 선이 미래적 공간의 벡터를 암시한다면, 안지혜의 선은 경험적 공간의 구조를 표상하며 동시에 그 공간에 대한 정동(affect)을 표현한다.

안지혜의 그림을 의미론적 차원으로 끌고 가는 것은 닫힌 사각형이다. 색으로 채워졌든 비었든, 온전하든 잘렸든 사각형은 그림에 직설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를 덧붙인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각형은 정동적인 선의 샘이고 작가의 체화된 감정 경험의 구조화이다. 안지혜 그림에서 사각형은 하나의 공간, 형상, 구멍, 출구, 혹은 막다른 곳으로서 그림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다.

이임수,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1. 작업노트

나의 작업은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로 오게 되면서 느낀 도시 경험에서 출발했다. 서울이라는 낯선 대도시의 공간과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에서 ‘흡수되지 못한 채 겉도는’ 경험의 기억을 지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에서 주로 보여지는 사각형의 공간은 도시의 공간, 거대 건물의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에겐 파악되지 않는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는 공간이다. 현대적 건물의 견고하면서 인공적인 직선의 이미지와 거대 공간에서 느껴지는 원근감은 서울이라는 도시감을 느끼게 해주는 특징이었다.

작품 속 화면은 앞뒤 공간의 꼬임이 반복되고 있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꼬임은 게슈탈트적 해석을 계속해서 방해하는 구조로 작용하는데, 맞는 듯 맞지 않는 판단이 연속되면서 시선이 화면 위를 겉돌게 한다. 또한, blur 효과를 이용한 탈 초점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명확하게 맞춰가려는 시각 작용에 반동을 주게 되면서 화면 위에 시선이 정착하지 못하게 한다.

이번 전시 <유리: 되다>는 공간과 관계로부터 유리된 시선으로 바라본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공간과 관계성에 대한 작업이다. 도시 공간에서 느낀 겉도는 감각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겉돌고 있던 불안과 긴장의 경험이 연결되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