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단체전 춤추는 별을 마주하다
COGITO
2024 06/05 – 06/11
3 전시장 (3F)
코기토. 거창한 서양철학 용어에 대학동창 전시모임이라… 허세가 심하다. 영어도 한문도 아닌 라틴어다. 절대적 진리나 존재의 이유, 그런 건 이미 담 쌓은 지 오래. 가족이라는 소집단의 양분이 되려, 있는 힘껏 사방팔방 버틴 세월에 몸속의 세포도 바삭바삭 해졌다. 어느 날 문득, 일상을 앞뒤로 끊어내는 그 순간, 바로 그 어느 날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하물며 콩나물을 다듬다가도, 엄마를 모시고 간 병원 대기실에서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난 어디로 가고 있지?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 온 나는 ‘나’로 여겨지지 않는다. 죽어라 달리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꿈의 반복이다. 그게 데카르트인지 칸트인지 철학은 1도 모르는 나는, 나의 존재에 의심을 품는다.
현대 회화의 추세를 논하고, 진리와 이상을 꿈꾸며 1989년, ‘코기토’는 시작됐다. 서울여대 서양화과 동문들의 전시 모임이다. 인맥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의 일관성은 없는 백화점식 전시, 혹은 친목을 위한 전시… 그것이 무엇이든 동문전시에 대한 암묵적 비하에도 불구하고, 35년을 꾸역꾸역 쌓고 또 쌓았다. 터진 곳은 여미고, 모난 돌기는 다듬으며 그 세월동안 서로의 쿵 내려앉는 가슴 달래주며 이어왔다. 일상의 연막에도 더욱 또렷해지는 의심은 절박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작의 순간임을 알려주는 SOS, 구조신호였다. 사유하는 나, 창조하는 나, 관계역할을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는 가둘 수 있는 것도, 잠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의심을 인정하자, 코기토라는 동문전시는 더 이상 친목이 아닌 살아있음의 문제가 되었다. 그저 생존이 아닌,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살아 숨쉬는, 깨어있는, 내가 되고 서로가 되었다. 33회 차 전시가 되니, 창립초기의 모든 촉수를 곧추 세우던 날카로운 열정은 아니지만 시간이 선사한 넉넉한 경험으로 꽤나 유연하고 묵직한 울림이 되었다.
“창조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 의심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벤 보티에)
그렇다. 심장이 보내는 외침으로, 코기토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향한 질문이 나를 찾는 여정임을 일상 속에서 서두름 없이 깨닫게 되었다. 분명, 창작은 사다리도 울타리도 필요치 않은 영역이다. 누군가의 밥그릇을 탐하는 일도, 딛고 넘어서야 할 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민낯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허울 좋은 기세들에 주눅들 이유도 없다. 물론 가끔은 그런 절대적 독립성과 자유로움이 오히려 벅차고 길을 잃게 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도 35년간 줄곧 코기토는 거기에 있었다. 습관처럼 조용하게 피는 골라내고 알 굵은 벼이삭은 묶어내며 나에게서 우리가 되어주었다. 코기토. 라틴어 아닌 더 폼 나는 미사여구를 쓴다 해도 전혀 허세롭지 않을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글 홍현아)